고전·역사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 재발견·재해석·재창조하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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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 재발견·재해석·재창조하는 글쓰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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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④ 옛것과 새것의 변통과 통섭…법고(法古)와 온고(溫故)의 미학⑩
 

[한정주=역사평론가] ‘술이부작(述而不作)’도 예외가 아니다.

공자는 말년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70여명의 군주와 제후들을 찾아가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덕치(德治)를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고향인 노(魯)나라로 돌아온 다음에는 오로지 노나라 사관(史官)의 기록을 바탕으로 『춘추(春秋)』를 저술해 온갖 인간사와 세상사의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을 역사를 통해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춘추』를 저술할 때 공자가 원칙으로 삼았던 역사서술이 다름 아닌 ‘술이부작(述而不作)’이었다.

사마천은 『춘추』 속 언사(言辭)가 정미(精微)하고 은미(隱微)하여 뜻이 깊고 넓은 까닭에 후대의 학자나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하거나 저술할 때 모두 『춘추』를 본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와 조선의 학자와 문장가들은 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다시 그 시대가 요구한 시대정신을 담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철학으로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며 재창조했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통해 어떤 학문과 사상이 올바르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다툴 필요도 없이 학문을 하고 글을 짓는 사람은 오로지 널리 배우고 견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말만을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즉 법고(法古)할 때는 주자가 옳기 때문에 주자학을 좇아야 한다거나 혹은 그 대척점에 있는 육구연이 옳기 때문에 양명학을 좇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정신에 입각해 두루 배우고 살피고 스스로 깨우쳐 창신(創新)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서 말하기를 ‘실사구시(實事求是)’, 곧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약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공허하고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지 선입견(先入見)을 주된 것으로 삼는다면 성현(聖賢)의 도리에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 학문하는 도리는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것에 있으니, 헛된 논설에 기대어 잘못된 곳에 숨어서는 안 된다. … 대체로 성현의 도리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진실한 것을 추구하고 헛된 것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아득하거나 어두운 속에서 이것을 찾거나 공허하고 광활한 가운데에서 이것을 방치한다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변별(辨別)할 수 없고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하는 도리는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고, 또한 구태여 정현(鄭玄)과 왕숙(王肅) 그리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장점과 단점을 따질 필요가 없다.

더욱이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 그리고 설선(薛瑄)과 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운을 고요하게 다스려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며 실천해나가는 것이 옳다.” 김정희, 『완당전집』, ‘실사구시설’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공자의 『춘추』가 추구한 역사 서술론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김정희가 역사적 실체와 진실에 접근할 때 철학적 모티브로 삼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사구시’는 사실을 기록해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17〜18세기 청나라 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등장한 실증(實證)과 고증(考證)과 변증(辨證)의 학문 방법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옛것에 근거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찾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홍길주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자의 역사 서술 방법론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맹점을 논파하기까지 했다.

역사서의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가 문장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곧 글을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길주는 역사의 객관적 서술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뜻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역사 서술을 주장하면서 과연 ‘글쓰기의 이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길주는 “아무개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해 두 사람에게 기록하라고 하면 한 사람은 한 마디 말로 바꾸거나 보태지 않고 군자(君子)로 그려내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한 마디 말도 바꾸거나 보태지 않고서 소인(小人)으로 그려낸다. 역사를 기록하는 붓끝이 부리는 조화가 이와 같다”라고까지 단언한다.

“경당 윤정진과 역사에 관해 토론하던 중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기록 또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어 공정하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에 다 믿을 수는 없다. 급암은 본래 의협심이 강하고 거칠며 고집불통인 사람이었고, 공손홍은 대학자였다. 다른 역사가를 만났다면 어떻게 등급이 매겨졌을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청과 곽거병은 여러 장수들 가운데에서도 전쟁의 공로가 가장 뛰어난 반면 이광은 수차례 패해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거나 여러 차례 기이했다는 한두 마디 말로 이들의 전공을 뒤집어 기록해 놓았다. 이로 인해 이광은 영원토록 남을 명장의 반열에 올랐고 위청과 곽거병은 그보다 못한 장수로 남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역사에 기록을 남겨 어떤 뜻을 품지 않고 사실만을 그대로 드러냈더라도 위청과 곽거병을 우러러 높이고 이광을 깎아 물리쳤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어찌 역사가의 취향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사적 사실을 잘 기록하는 사람은 굳이 붓을 돌려 쓸 필요 없이 원래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무엇이 올바르고 잘못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큰 기준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아무개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해 두 사람에게 기록하라고 하면 한 사람은 한 마디 말로 바꾸거나 보태지 않고 군자(君子)로 그려내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한 마디 말도 바꾸거나 보태지 않고서 소인(小人)으로 그려낸다. 역사를 기록하는 붓끝이 부리는 조화가 이와 같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역사의 기록이라고 다 믿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단지 사마천의 역사 기록만 살펴보더라도 ‘위청은 신중하고 성실하며 후덕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을 삼가고 잘 계획하여 지위를 얻었고, 이광은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어서 호랑이와 맨손으로 맞서 싸우고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무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마천이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 어떤 사람은 힘껏 높이고 어떤 사람은 애써 깎아내렸지만, 그 본래 모습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홍길주, 『수여난필』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한 E.H.카의 주장을 보는 듯하다. 공자의 ‘술이부작’이 랑케의 역사관에 가깝다면 홍길주의 역사관은 E.H.카와 비슷하다고 하면 필자의 과도한 해석일까?

여하튼 조선의 지식인과 문장가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요구한 시대정신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논어』와 같은 경전이나 성인인 공자의 말씀조차도 과감하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오늘날 고전과 역사를 읽고 배울 때 단순히 그 기록과 내용만을 알고 익힐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현대적 의미와 가치로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며 재창조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반드시 ‘법고(法古)’하면서도 옛것에 구속받지 않고 변화에 통달할 줄 알며 ‘창신(創新)’ 하면서도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짓지 않는 글쓰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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