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의 학문 추구했던 허목의 독특하고 기발한 소요산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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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의 학문 추구했던 허목의 독특하고 기발한 소요산 기행문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1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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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②
▲ 미수 허목과 소요산 기행이 실린 『미수기언(眉叟記言)』.

[한정주=역사평론가] 17세기 중·후반 근기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은 주자성리학만을 숭상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원유학(原儒學)을 중시하는 고학(古學)과 제자백가·역사·의약·복서·풍수지리 등에 두루 능통했던 박학(博學)의 학문을 추구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후대에 등장하는 남인 출신의 실학자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난 학문을 추구했던 그는 문장에 있어서도 독특하고도 기발한 글을 많이 남겼다.

“소요산은 양주읍 북쪽 40리에 자리하고 있다. 한탄강에서 20리가 채 되지 않고 왕방산 서쪽 기슭의 별산(別山)이다. 그곳의 골짜기 입구 안팎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왕궁의 옛 터 두 곳이 있는데 무성하게 자란 잡초 속에 두어 층의 돌계단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태조대왕(이성계)의 행궁(行宮)이었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100리 떨어져 있는데 풍양궁(豊壤宮) 역시 100리이다. 계곡 입구에는 지금은 버려진 우물의 돌난간이 있다. 산으로 들어가면 모두 돌이어서 봉우리와 동굴, 등(燈)과 다리 또한 다 돌로 되어 있다. 산의 나무는 소나무, 단풍나무, 철쭉나무가 많다.

행궁의 옛 터가 남아 있는 남쪽 산에는 돌이 아주 뾰족하게 솟아 있다. 가장 높은 곳에 백운대가 있고, 조금 아래로는 중백운이 있다. 다시 조금 아래 동북쪽에 하백운이 중대(中臺) 위에 있다.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 높이가 8~9인(仞: 1인은 8척)이나 되고 그 아래로 그늘진 언덕을 따라 중대(中臺)로 올라가다 보면 큰 사찰이 나온다. 지금은 모두 빈 터만 남아 있다.

높이가 10여 인(仞)이나 되는 절벽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원효대이다. 원효대를 지나 더 가면 소요사가 나온다.

소요사의 벽에 적혀 있는 기록을 보면 ‘신라의 고승 원효가 이 산에 머물렀다. 그후 300년 갑술년에 고려의 스님 각규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정사(精舍)를 세우고, 다시 그후 200년 계유년에 정사가 불에 탔다. 그 이듬해 갑술년에 관동의 스님 각령이 불전과 법당을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목암의 기록에는 ‘원효는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시대의 고승이다. 그 시대로부터 우리 태조대왕 갑술년까지는 767년이 된다. 또한 만력 갑술년까지는 180년이나 되는데 소요사의 기록에 ‘300년’이라고 적혀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라고 했다.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를 구경했다. 그 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5~6장이나 되는 큰 돌이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암벽 사이의 돌 틈에서는 샘물이 졸졸졸 흐른다. 이곳이 바로 원효정(元曉井)이다. 고려시대의 대문장가 이규보는 이런 시를 남겼다.

‘산을 돌아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 / 발을 포개 좁은 길을 걸었네 / 높디높은 산마루에 / 일찍이 원효 스님이 집을 지었구나 / 신령스러운 자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 그림자만이 흰 비단 폭에 남아 있구나 / 차 달인 샘에 차가운 물이 고여 / 잔을 들어 마셔보니 젖처럼 맛있네 / 예전에 이곳에는 물이 없어 / 스님들이 거처하며 살 수 없었지만 / 원효대사가 찾아와 머물자 / 단물이 돌 틈에서 샘솟았네.’

암벽을 오르고 절벽과 골짜기를 돌아 바위 위에 올라서 구봉(九峯)을 바라보니 소요산의 모든 돌들이 기묘했다. 중봉의 바위 구멍을 따라 현암(懸庵)의 동남쪽으로 나와서 의상대에 올랐다. 이곳이 이 산의 최정상이다. 그 북쪽은 사자암이다. 골짜기 입구를 따라서 폭포를 지나 의상대에 오르기까지 높이가 9000장이나 된다.

10월 늦가을이어서 산은 깊고 골짜기는 음산하지만 아침 비가 지나간 후 시냇가 돌에 낀 푸른 이끼는 봄날 같고 단풍잎은 아직 마르지 않았구나. 허목, 『미수기언(眉叟記言)』 ‘소요산 기행(逍遙山記)’

그러나 비록 일찍이 ‘진경의 미학’을 보여준 선각자적인 몇몇 문장가들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진경 시와 산문’이 하나의 시대사조처럼 유행한 시기는 어떻더라도 정선의 진경산수화 이후 활동한 세대의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진경산수화가 ‘진경시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진경 시와 산문은 ‘진경시대’를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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