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정약용의 ‘유세검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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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정약용의 ‘유세검정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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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④
▲ 겸재 정선, 세검정, 61.9x22.7cm, 174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익을 사숙(私淑)한 제자였던 정약용의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를 보면 이익의 문장 철학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검정이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란 소나기가 내릴 때 폭포처럼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면 대개 수레를 적셔가면서 교외로 나가려고 하지 않고, 비가 갠 후에는 계곡의 물 역시 이미 그 기세가 꺾이고 만다.

이 때문에 세검정은 도성 근처에 있음에도 성 안의 사대부 가운데 정자가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를 만끽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해년(辛亥年: 1791년. 정조 15년) 여름날, 나는 한혜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모였다. 술이 여러 잔 돌고 나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확 올라오면서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이 광경을 보고서 나는 벌떡 일어나 ‘소나기가 내릴 징조네. 함께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만약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꺼번에 벌주(罰酒) 열 병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 ‘이를 말인가!’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부를 재촉해 창의문을 나서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더욱 힘껏 말을 달려 세검정 아래에 당도하니 수문(水門) 좌우의 계곡에서는 고래 한 쌍이 물을 뿜어내듯 이미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옷소매 역시 빗방울에 얼룩졌다.

세검정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난간 앞의 수목(樹木)은 이미 미친 듯 흔들리고 한기(寒氣)가 뼈 속을 파고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요란하게 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흘러내리고 돌이 굴러 물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이 세검정의 주춧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물살의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맹렬해 정자의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자 모두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그래서 내가 ‘어떠하냐?’고 묻자 모두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와 익살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놀았다. 시간이 지나자 소낙비도 그치고 구름도 걷히면서 계곡 물 역시 점차 잔잔해졌다. 저녁나절이 되자 지는 해가 나무에 걸려서 붉으락푸르락 천만가지의 형상을 띠었다. 서로 팔을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한참을 지나 이 소식을 들은 심화오가 허겁지겁 쫓아왔다. 그러나 이미 물살은 잔잔해진 뒤였다. 처음 심화오 더러 함께 오자고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여러 사람이 뒤늦게 달려온 그를 두고 조롱하며 약을 올렸다.

심화오와 함께 술을 한 차례 돌려 마시고 돌아왔다. 당시 그 자리에는 홍약여, 이휘조, 윤무구도 함께 있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세검정에서 노닌 기록(游洗劍亭記)’

▲ 유숙, 세검정, 19세기, 지본담채, 26.1×58.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치 200여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는 날 세검정에 앉아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산문이다.

만약 정약용이 묘사한 바로 그러한 날 세검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가서 ‘유세검정기’를 감상해보라. -물론 지금의 풍경은 당시와는 매우 다르지만-아마도 정약용의 글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 세검정 바로 옆으로 지금은 도로가 나서 주택이 들어서 옛 풍경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한양의 승경(勝景: 빼어난 경치)을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명승지가 있다.

다름 아닌 ‘탕춘대’가 바로 그곳인데, 지금은 단지 도로 옆에 탕춘대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가 ‘조선 사상사에서 가장 뛰어난 양명학자’라고 극찬했던 대학자 하곡 정제두가 남겨놓은 ‘탕춘대기((蕩春臺記)’를 통해 마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듯이, 옛 한양의 승경 ‘탕춘대’를 구경할 수 있다.

이 글 속의 종이를 제조했다는 ‘조지서(造紙署)’ 역시 탕춘대의 표지석이 있는 길 건너편에서 북악터널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세검정초등학교 버스정류장이 나오는 곳에 조지서 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앞의 세검정과 함께 탕춘대 터와 조지서 터를 찾아 걷다보면 정약용과 정제두가 묘사한 당시 풍경을 아쉽더라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정제두의 『하곡집』과 본문.

“한양 서북쪽에 자리한 백악산의 오른 기슭에 문이 있다. 장의문(莊義門)이다. 그곳 오른쪽에 큰 산이 우뚝 솟아 길게 둘러싸 남쪽으로 뻗어 내렸다. 삼각산으로부터 내려온 백악의 줄기이다.

장의문의 왼쪽으로는 산이 갈라져 있는데 북쪽 아래에는 산의 형세가 오른쪽 산과 서로 대칭을 이루어 바위와 돌이 더욱 기묘하고 괴이하다. 아슬아슬하게 솟아 오른 바위가 하나는 남쪽으로 내달리고 하나는 북쪽으로 달아나 그 사이에 시냇물을 만들었다. 위로는 탁 트여 구렁을 이루고 아래로는 점점 좁아져 협곡이 되었다.

이렇듯 5리쯤 가다보면 들판이 나타나는데 그곳은 오른쪽 산의 남쪽이 된다. 한 골짜기는 나뉘어 왼쪽으로 달리는데 두 산 사이에서 돌연 우뚝한 언덕을 이룬다. 그 위는 넓고 평평한데, 바로 탕춘대(蕩春臺)이다.

오른쪽 산 아래가 안대(案臺)로 종이를 제조하는 관청인 조지서(造紙暑)가 있다. 조지서 위로는 폭포수가 있어서 거꾸로 내려오는데, 곧 냇물의 원천이다. 그 물은 곧바로 탕춘대를 싸고돌아 왼쪽으로 양 협곡 사이를 흘러간다. 그 구렁은 모두 돌이어서 넓고 편편하며, 그 땅은 모두 모래여서 하얗다.

돌이기 때문에 냇물은 졸졸졸 울며 흐르고, 모래이기 때문에 냇물은 맑고 깨끗하다. 손으로 물장구를 쳐도 냇물이 혼탁하지 않으니 모래와 돌과 물이 서로 잘 어울렸다. 모두 매끈하고 마치 갈아놓은 듯 밝게 빛나서 햇빛과 모래 색이 환하게 서로를 비쳐주었다.

맑은 바람과 비취빛 소나무가 운치를 이루어서 참으로 산간(山間)의 빼어난 풍경을 띠었다. 산수(山水)의 수려함과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은 이곳을 으뜸으로 삼았으니 유람하러 나서는 사람들이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는 까닭은 사람마다 제각각 달랐다. 봄이 한창이던 경술년 윤달에 다섯 명의 벗이 술을 들고 탕춘대로 소풍을 갈 때 나 역시 따라 나섰다. 그윽한 정을 드러내고 번잡한 마음을 씻어냈다.

그러나 오로지 한가함만 즐기지는 않았다. 드디어 냇물의 흐름을 따라 술잔을 띄우고 냇물을 끼고 앉아 차례로 술을 마시며 취하자 서로 서로 손을 잡고 냇물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했다.

서로 서로 앞서고 뒤서면서 길게 노래하고 짧게 읊으며, 뒤돌아보며 주고받으니 또한 놀고 감상하는 즐거움이 지극했다. 그래서 서로 ‘이런 곳이 아니라면 이런 놀이를 즐길 수 없고, 이런 놀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날을 즐겁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오늘의 놀이와 풍경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옛날 왕희지가 곡수(曲水)에서 술잔을 띄우고 놀던 일이나 난정(蘭亭)에서 즐거움을 누렸던 일이 오늘 우리들과 비교해 어떠하겠는가. 옛일을 끌어들여 오늘 하는 일과 스스로 비교하는 것은 진실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감흥이다.

그러나 옛일이 어찌 곡수와 난정뿐이겠는가. 제자 증점이 늦은 봄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일을 공자는 받아들여 칭찬했고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하는 즐거움은 송나라의 성리학자들도 허락한 풍류였다. 지금 우리들이 힘써 즐겨야함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정제두, 『하곡집(霞谷集)』, ‘탕춘대기(蕩春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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