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②조세 수취체제의 근본적 취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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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②조세 수취체제의 근본적 취약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1.1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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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 김홍도 『단원풍속첩』 중 ‘벼타작’. 종이에 수묵담채. 27㎝×22.7㎝. 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한정주=역사평론가] 대동법은 양대 전란과 정치적 혼란으로 붕괴된 나라 경제와 재정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의 노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나라 재정의 가장 큰 자원을 백성, 특히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공물, 곧 조세에 두었다. 당시 조세 수취 체제는 각 지방의 토산물을 중앙 관청에 직접 납부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조세 분담은 각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 체제에는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첫째 조세 분담은 국가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과 수량을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가뭄·홍수 등의 천재지변이나 전란의 참화를 입었다 하더라도 감면받기 어려웠다.

둘째 공물의 규격이나 수량에 대한 검사 과정에서 지방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로부터 몇 배에 달하는 공물을 더 받아 내는 폐단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행위를 통상 ‘점퇴(點退)’라고 한다.

셋째 그 지방에서 생산하지 않는 토산물을 공물로 부과받은 경우나 수송과 저장이 곤란한 토산물 혹은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해 공물 마련이 곤란한 경우에는 상인이나 관리들이 해당 공물을 나라에 대신 납부해 주었는데, 이때 그들은 몇 십 몇 백 배에 달하는 이익을 붙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와 같은 대납 행위를 두고 ‘방납(防納)’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폐단에도 백성들은 공물을 직접 납부하는 데 따르는 숱한 어려움 때문에 관리나 상인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자 농민들은 집과 토지를 버리고 유랑민으로 전락하거나 도적으로 변해 조정에 대항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나라 재정이 취약해지고 민심은 이탈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6세기 중종 때 조광조가 조세 수취 체제의 개혁을 주장한 것이나 임진왜란 이전 이이가 지방 토산물 대신 미곡(쌀)을 거두어들이자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한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경제 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조세 수취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가 전란으로 인해 급격하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 동원에 시달리다 못해 일정한 거처나 생업을 갖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동인구의 증가는 조세 수취 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선조수정실록』 34년 8월1일자에 실린 이항복의 발언을 보면 전란 이후 조선의 인구가 10분의 1로 줄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비록 경기도에 국한되었으나 대동법이 최초로 시행되고 다시 1624년 강원도로 확대 실시된 것은 이러한 조세 수취 체제의 위기와 나라 재정의 파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동법의 시행은 주요 곡창지대인 하삼도(下三道), 곧 충청·전라·경상도를 제외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특히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정치 혼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경기도와 강원도의 대동법조차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그 이외 지역은 점퇴와 방납의 폐단이 더욱 극심해져 농민의 유랑민화 혹은 도적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효종실록』 2년(1651년) 7월24일자에 실려 있는 효종과 조정 관료 이후원의 대화 내용을 보면 이 같은 사태의 심각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효종 : 남쪽 지방의 도적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후원 : 모두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효종 : 이들은 좀도둑과는 비교할 수 없다. 반드시 이들을 지휘하는 큰 괴수가 있을 것이다.
이후원 : 지금 만약 그들 삼남(三南) 지방의 도적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살아남을 백성들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효종 : 명나라가 마침내 유랑하는 도적떼에 멸망하였는데, 이 또한 두려워할 만한 존재다.

이렇듯 양대 전란 이후 조선의 조정은 전후 복구 사업은 고사하고 가혹한 공물 납부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인해 조세 수취 체제가 붕괴하고 나라 재정은 파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김육이 사회경제개혁정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삼남(三南) 지방에 대한 대동법의 전면 실시였다. 김육은 이 개혁정책만이 점퇴와 방납의 폐단을 없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나라 재정을 부유하게 만들어 전후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추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김육은 인조 16년(163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된 후 처음으로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육의 건의는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로 인해 큰 이득을 얻고 있던 정치사회 세력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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