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檀園) 김홍도…‘선비(士)’가 되기를 바랐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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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檀園) 김홍도…‘선비(士)’가 되기를 바랐던 화가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4.04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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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⑥…조선 대표 화가의 삼원(三園))①

▲ 단원 김홍도
김홍도는 누구도 이론(異論)을 달지 않을 조선 최고의 화가다. 그는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불화, 동물화, 초충화(草蟲畵) 등 그림에 관한 한 모든 방면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독보적인 인물이다.

김홍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양반가에서 태어났다는 설, 중인(中人) 집안 출신이라는 설, 원래 무반(武班)이었으나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설 등 그 출신 배경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홍도의 증조부인 김진창(金震昌)이 만호(萬戶)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와 집안이 원래 무반(武班)이었으나 중인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 듯하다.

김홍도에 관한 가장 어릴 적 기록은 그가 스승으로 모신 문인화가(文人畵家 : 사대부 출신 화가) 표암(豹菴)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남아있는 ‘단원기(檀園記)’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강세황은 “김홍도가 어린 시절부터 내 집에 드나들었다”고 했다. 실제 김홍도는 7∼8세 어린나이 시절부터 20세 때까지 경기도 안산에 살던 강세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 ‘신필(神筆)’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김홍도는 21세 때 이미 도화서의 궁중화원으로 영조의 즉위 40주년과 칠순을 기념하는 잔치를 묘사한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그렸고, 1773년(영조 49년) 나이 29세 때는 당대 최고의 화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임금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이름을 올릴 만큼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다.

또한 1781년(정조 5년) 어진을 모사한 공로로 2년 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고, 1791년(정조 15년) 다시 어진을 그린 공로로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임명되는 영광을 입었다.

화원 출신으로 현감에 오른 사람은 김홍도 이전에 겨우 2명 남짓 있을 정도로 중인 출신이 목민관이 된다는 것은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그처럼 컸던 것이다.

당시 김홍도가 누렸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앞서 언급한 강세황의 ‘단원기’에 적혀 있다. 여기에서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을 일컬어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이르고 교묘하게 하늘의 조화를 빼앗을 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필자는 스승이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이토록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경우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고금(古今)의 화가들은 각자 한 가지는 잘했지만 여러 가지를 능숙하게 잘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김홍도는 근래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익혀서 모두 다 잘한다. 인물(人物)·산수(山水)·선불(仙佛)·화과(花果)·금충(禽蟲)·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속해 옛사람과 비교해도 그와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 단원의 스승 표암 강세황
또한 신선(神仙)과 화조(花鳥) 그림 역시 뛰어나 이미 한 세대를 울리고 후대에 전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인물(人物)과 풍속(風俗)을 모사하는데 탁월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의 여인, 농부, 누에치는 여인, 이중으로 된 방(房), 겹으로 난 문(戶), 황폐한 산, 들판과 나무 등을 간곡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서 그 형태와 용모가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았으니 일찍이 옛적에는 없었던 솜씨다.

무릇 화가는 모두 천과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배우고 익혀 실력을 쌓아야 거의 비슷하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이르고 교묘하게 하늘의 조화를 빼앗을 수 경지에 도달하려면 천부적으로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어찌 보통 사람보다 빼어나게 뛰어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닭이나 개를 그리는 것은 어렵고 귀신을 그리는 것은 쉽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김홍도의 절묘한 기예(技藝)에 놀라서 지금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감탄한다. 이에 김홍도의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 비단이 겹겹이 쌓이고, 그림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문에 가득하여 잠자고 밥 먹을 겨를조차 없을 지경이다.” 『표암유고』, ‘단원기’

그런데 18세기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우리 역사 최고의 화원(화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홍도의 자(字)와 호(號)에 담긴 뜻을 찾아가던 필자는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김홍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화가’가 아닌 ‘선비(士)’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먼저 김홍도의 자(字)인 ‘사능(士能)’의 유래부터 찾아보자.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정한 소득이 없어도 항상 같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 만약 백성에게 일정한 소득이 없다면 항상 같은 마음을 간직할 수 없다. 진실로 항상 같은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 등 못할 짓이 없게 된다.”

김홍도는 여기에서 ‘유사위능(惟士爲能)’, 즉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는 구절을 빌어 자신의 자를 ‘사능(士能)’이라고 했다. 단원(檀園)이라는 김홍도의 대표적인 호 역시 마찬가지다.

▲ 단원이 연풍현감(延豊縣監) 시절 집무실로 사용했던 충북 괴산의 연풍동헌 풍락헌.
단원은 원래 명(明)나라 시절 사대부 화가로 이름을 날린 이유방(李流芳)의 호다. 이유방은 문사(文士)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김홍도는 단원을 자호로 취해 비록 화원의 신분이었지만 이유방처럼 시·서·화에 두루 통달한 ‘고상한 문사(文士)’를 자신의 평생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특히 김홍도는 단원이라는 호를 짓고 어릴 적 자신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쳐준 스승 표암 강세황에게 특별히 이와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강세황은 정조 때 병조참판(종2품)과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정2품)까지 오른 문신(文臣)이면서 그림을 잘 그려 문인화가(文人畵家)로 크게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어릴 적 글과 그림을 배운 스승도 문사(文士)이자 화가(畵家)였고 평생 모델로 삼은 이유방 또한 그러했으니 김홍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았을 지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다. 어쨌든 강세황이 쓴 ‘단원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김홍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글이다.

“영조(英祖) 재위 시절 김홍도는 어진(御眞 : 임금의 초상화)을 그릴 때 참여하여 도왔다. 또한 지금의 임금(정조)에 와서도 명을 받들어 어용(御容 : 임금의 용안)을 그려서 크게 칭찬받고 특별히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돌아와서는 방 하나를 치우고 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여러 좋은 나무들을 심었다. 집안이 맑고 깨끗해 먼지 한 점 일지 않고, 탁자와 걸상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 날카로운 붓, 아름다운 먹, 서리같이 새하얀 비단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 자호(自號)를 단원(檀園)이라고 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생각해보니 단원(檀園)은 명나라 이유방(李流芳)의 호다. 김홍도가 그것을 이어받아 자신의 호로 삼은 뜻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문사(文士)의 고상하고 맑은 인품과 기묘하고 우아한 그림을 사모하는데 있을 뿐이다. 지금 김홍도의 사람됨은 그 얼굴이 부드럽고 빼어나며 정신은 세속을 벗어난 듯 깨끗하니 보는 사람은 모두 그가 고상하고 우아하며 세속을 초탈하여 여항(閭巷)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품 또한 거문고와 피리의 우아한 소리를 좋아해서 꽃 피고 달 밝은 밤이면 수시로 한 두 곡조를 즐기며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그 기예(技藝)가 옛사람을 곧바로 따라갈 만하고 풍채가 헌칠하고 우뚝하여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사이의 고상한 선비 가운데서나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이유방과 견준다면 그보다 훨씬 앞서 미치지 못한 것이 없다.

돌이켜보니 늙고 쇠약한 내가 일찍이 김홍도와 사포서(司圃署)의 동료로 지냈다.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김홍도는 내가 쇠약한 것을 딱하게 생각해 그 수고로움을 대신해주었다. 이것이 내가 더욱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다. 요사이 김홍도의 그림을 얻은 사람들이 번번이 나를 찾아와 한 두 마디 평(評)이나 발문을 구한다. 궁중의 병풍과 두루마리에도 간혹 졸렬한 내 글씨가 붙어 있다. 김홍도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잊어버린 친구라고 할 만하다. 내가 단원(檀園)에 대한 기문(記文)을 사양할 수 없었고, 또한 단원이라는 호에 대한 짤막한 평을 미처 하지 못한 것과 대략이나마 김홍도의 평소 삶을 적어서 이에 응답한다.” 『표암유고』, ‘단원기’

▲ 김홍도의 ‘자화상’은 독특하게도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고 간략하게 그려져 있고, 선비들이 착용하는 도포와 망건은 얼굴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크게 묘사되어 있다.
김홍도가 지금의 경북 안동에 있던 안기찰방(安基察訪)에 임명된 해는 1783년 12월이다. 그곳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하고 난 후 1786년 5월경 집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786년 그의 나이 42세 무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김홍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비(士)’에서 찾았다는 사실은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自畵像)’ 한 점과 또 자화상으로 짐작되는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한 점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자화상은 대개 얼굴 묘사에 큰 비중을 둔다. 자신의 내면세계(자의식)와 삶의 여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화상에는 보통의 그림에 존재하는 배경이나 사물 묘사는 간략하게 나타나거나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게 마련이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물론이고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역시 ‘얼굴’이 가장 도드라지게 그려져 있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김홍도의 ‘자화상’은 독특하게도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고 간략하게 그려져 있고, 그 대신에 선비들이 착용하는 도포와 망건은 얼굴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크게 묘사되어 있다. 더욱이 자신이 앉아 있는 방과 그곳에 놓여있는 탁자 그리고 그 위의 벼루와 붓, 먹 등 여러 가지 기물(器物)까지 그려 넣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단번에 고상한 선비의 풍모를 느낄 수 있도록 작정하고(?) 그린 ‘자화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포의풍류도’는 김홍도가 50세 무렵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선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포의풍류도’는 김홍도가 50세 무렵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선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포의풍류(布衣風流)란 벼슬하지 않는 선비가 베옷을 입고서도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얼굴’의 비중은 앞서 언급했던 ‘자화상’보다 훨씬 적다. 그림의 주인공은 큰 당비파(唐琵琶)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 주변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서책과 골동품, 검, 생황, 거문고, 파초잎 등이 놓여 있다. 다분히 문인(文人) 취향의 소재들이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기창토벽종신 포의소영기중(綺窓土壁終身 布衣嘯詠其中)”이라는 글귀와 함께 ‘단원(檀園)’이라고 적혀 있다. 이 화제(話題)을 해석하면 이렇다.

“종이창과 흙벽에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는 선비로 피리 불고 시 읊으며 그 속에서 살리라. 단원.”

이 정도면 김홍도가 평생 지향했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화가 보다는 선비이자 문인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김홍도를 단지 화가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화가+선비’, 즉 문인화가(혹은 사대부 화가)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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