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④ 조세 정의 내건 분배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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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④ 조세 정의 내건 분배론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1.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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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 김윤보의 『풍속도첩』중 ‘소작료 납입’. 19세기 말. 종이에 수묵 담채. 개인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한정주=역사평론가] 김육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성장론자’라기보다는 ‘분배론자’에 가까운 경제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조세 정의를 통한 분배에 큰 무게를 두었다.

당시 나라 재정의 가장 큰 몫은 백성들이 납부하는 조세였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 조세 납부는 갖가지 폐단으로 말미암아 삶과 생활의 근간이 뒤흔들릴 만큼 큰 부담이었다.

따라서 국가 경제 복원과 분배정책의 핵심을 조세 수취 체제의 개혁에서 찾은 김육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이 조세 부담을 못 이겨 집과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거나 도적으로 변하는 사회경제 현상은 곧 대다수 백성들을 빈곤하게 만든 반면 일부 대토지 소유자나 부농, 지주 그리고 부패 관료와 상인들만을 부유하게 하는 ‘부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더욱이 앞서 지적했듯이 공납제 덕분에 일부 부유 계층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조세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조세 납부를 회피해 더욱 재산을 불려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의 국가 경제를 뒤흔들고 왕실 및 관청의 재정을 궁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었다.

이에 김육은 조세 정의의 실현이야말로 사회 계층 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나라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현실 정치에 옮겨 적용한 경제정책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김육의 경제사상과 대동법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그가 효종이 즉위한 해(1649년)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주청한 상소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먼저 백성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을 살찌우고 권력이 있는 세도가를 섬기는 일에만 충실하기 때문이고, 둘째 지방의 세력가와 부자들이 제멋대로 토지 소유를 늘리기 때문이며, 셋째 사신 행차가 많아 대접하고 물품을 조달하느라 백성들이 곤궁해진다는 것이다.

곧 탐관오리, 권세가, 토호, 부자, 사신들은 나날이 부유해지는 반면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질 뿐이라는 지적이다.

김육은 이와 같은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를 혁파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대동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대동법은 부역과 조세를 균등하게 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실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훌륭한 정책이라고 했다.

또한 국가의 정책이란 마땅히 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입안하고 집행해야지 부호들이 대동법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 뜻을 좇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김육은 경제정책의 핵심을 소수의 부유 계층이 아닌 다수의 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에 두어야 한다는 ‘분배론자’의 입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성장론자들은 1인당 국민소득, 연간 수출량, 경제성장률, 종합주가지수 등 ‘국가’ 차원의 경제 지표를 중시하는 반면 분배론자들은 도시 계층 간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나 도시·농촌 간 소득 불균형을 나타내는 경제 지표에 더 관심을 둔다.

즉 국가 차원의 경제 지표가 성장론자들의 관심사라면 국민(개인) 차원의 경제 지표는 분배론자들의 관심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육은 성장론자보다는 분배론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때문인지 그는 오늘날의 분배론자들처럼 ‘국가’보다는 ‘백성(개인)의 삶’을 더 우선시했다.

이러한 그의 경제사상은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는 안민익국론(安民益國論)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안민익국론을 요즘 식 표현으로 풀어본다면 ‘선(先) 민생 후(後) 부국 혹은 선 분배 후 성장’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하늘도 반드시 따르기 때문에 임금은 백성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 몇 백만 명이 원하는 대동법을 단지 50여명에 불과한 지방 수령들의 반대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훌륭한 임금은 국가에 이롭지만 백성에게는 해로운 정책을 결코 강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곧 국가나 관청의 이익과 백성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경우 마땅히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는 백성들이 고르게 잘 살아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백성들이 일정한 거처를 두고 생업에 전념할 의욕을 갖지 못한다면 그 원망이 하늘과 같은 큰 힘을 지녀 나라의 안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의 삶이 안정된 후에야 비로소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김육의 기본 생각이었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고 집요하게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이유 역시 먼저 백성의 삶이 안정되고 나라에 대한 원망이 없어져야 나라의 재정과 경제 또한 부유해지고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동법 이외에도 김육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러 가지 정책과 경제사상을 펼쳤다. 조선 후기 상공업을 발달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주목받는 화폐의 유통 역시 김육에게서 비롯되었다.

『만기요람』은 효종 2년(1651년) 정승의 자리에 오른 김육이 지방 수령들로부터 구리와 철을 모아 화폐를 주조한 것이 돈의 시초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후 100여년을 내려오면서 ‘화폐 혁파 여부’를 두고 여러 번 조정 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마침내 없애지 못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육이 첫 관문을 연 ‘화폐 유통’은 숙종 4년(1678년)에 국가 화폐인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전국으로 보급 확산될 수 있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로써 조선은 본격적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시대를 활짝 열 수 있었다.

이외에도 김육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수레 사용과 도로 확장 및 개선을 주장했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수차 제조와 보급에도 힘썼다.

이러한 김육의 경제사상은 18세기 들어 상공업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을 역설한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북학(北學)’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김육은 평생 동안 오로지 수레와 화폐 사용 두 가지 시책을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썼다”고 한 대목은 북학파 실학자들이 그의 경제사상과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육을 ‘북학파의 원조 혹은 선구자’로 여기기도 한다.

여하튼 김육은 근대적인 상품 화폐와 시장경제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17세기 조선 사회에 거대한 뿌리를 드리운 사람이다. 특히 경제개혁과 상공업, 시장경제의 장려를 주창한 후대 실학자들 대부분이 현실 정치나 정책 집행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최고 관료의 신분으로 자신의 경제사상과 개혁안을 현실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천했다.

조선 역사 속 인물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김육처럼 사상과 실천이 밀착되어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김육은 조선사 최고의 경제 관료 혹은 관료 경제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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