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①개혁 세력으로 등용된 남인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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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①개혁 세력으로 등용된 남인의 핵심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2.03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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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 번암 채제공의 초상.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 역사 전반부를 대표하는 성군이자 개혁 군주하면 누구나 세종대왕을 쉽게 떠올린다. 또 후반부를 대표하는 성군이자 개혁 군주하면 정조대왕이라고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세종시대와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을 꼽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세종시대=황희’, ‘정조시대=?’라는 답을 내놓는다.

이 ‘정조시대=?’라는 물음표를 채워주는 인물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번암 채제공이다.

정조는 즉위 12년이 되는 1788년 전격적으로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다. 채제공의 발탁을 전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전 80여년 동안 노론 당파 출신이 아닌 인물이 정승의 자리에 오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은 곧 정조대왕이 본격적으로 노론 세력의 권력 독점을 혁파하고 남인 당파를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등용하겠다는 신호탄이었다.

선왕인 영조시대에 조정을 완전 장악한 노론 세력은 정조가 어렸을 때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를 자신들 당파와 노선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모함해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정조는 즉위 과정은 물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한동안 집권 세력인 노론 당파의 정치적 저항으로 자신의 개혁 의지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간 정조는 즉위 중반 이후부터 ‘왕권 강화를 통한 체제 개혁’을 정치 노선으로 삼은 남인 당파를 조정 내부로 흡수해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첫 단추가 채제공의 우의정 발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가 남인 당파를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첫 조치로 채제공을 정승에 발탁한 이유는 당시 채제공이 남인 세력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영수였기 때문이다.

채제공의 개인문집인 『번암집』을 국역한 남만성 씨는 그가 이황, 정구, 허목과 홍우원, 윤휴, 윤선도의 정치사상을 이어받고 이익, 강박, 오광운의 학문을 전수한 남인 당파의 중심인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학문과 사상의 계보를 통해서도 채제공이 노론 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 속에서 개혁과 실학사상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발탁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채제공은 일찍이 노론 당파의 정치적 모함으로 영조와 사도세자가 불화를 거듭할 때 온 몸을 던져 둘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것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정조가 보기에 채제공은 개혁사상과 함께 임금에 대한 충직함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이렇듯 군신 간의 의리와 강직한 성품 덕에 정조 즉위와 동시에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용됐으나 그만큼 노론 당파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우의정에 발탁되기 이전 8여년 동안 한양 주변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채제공은 젊었을 때부터 남인 학자들의 진보적인 학문과 실학사상을 익히고 100여년 가까운 서인(노론) 세력의 권력 독점이 낳은 폐단을 지켜보면서 조선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와 체제 개혁’이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의정으로 발탁된 이후 정조와 더불어 개혁 세력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자신의 개혁 의지와 구상을 하나 둘씩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채제공의 경제사상과 정책의 핵심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신해통공’과 ‘경제 신도시 화성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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