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산문의 백미 ‘검무기’…“한 편의 동영상에 담긴 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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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산문의 백미 ‘검무기’…“한 편의 동영상에 담긴 내레이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2.12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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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⑪
▲ 신윤복의 ‘검무도’. <간송미술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진경시대의 회화가 처음 진경산수를 묘사하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 시작해 점차 사람 사는 풍경을 묘사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로 발전하였듯이 진경 산문 또한 자연 풍경의 묘사에서 삶의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검무(劍舞)를 묘사한 박제가의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 속의 ‘검무기(劍舞記)’와 경상도 삼가현의 시골 시장 풍경을 묘사한 이옥의 ‘시기(市記)’이다.

박제가가 20세 때 관서(關西) 지방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던 묘향산을 유람하다가 검무를 구경하고 쓴 ‘검무기(劍舞記)’는 북학파 그룹의 문인들이 자연 풍경의 묘사 못지않게 당대의 풍속과 풍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문장 솜씨 또한 뛰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두 명의 기생이 검무를 추었다. 융복(戎服)을 입고 전립(氈笠)을 썼다. 잠시 절을 하는가 싶더니 돌아서서 마주 보고 서서히 일어났다. 이미 스치듯 귀밑머리를 매만지고 다시 옷깃을 여미다가 버선발을 들어 치마를 살짝 차고 소매를 들어올렸다. 칼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한가로이 빙빙 돌며 오로지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방의 구석진 곳에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높고 피리 소리는 맑았다. 이 순간 두 기생이 일제히 나와 한참 동안 서로 겨루듯 맞서더니 소매를 펼쳐 합쳤다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갈라섰다.

이내 소매를 나부끼며 앉았는데 눈은 칼을 주시하면서 잡으려고 하다가 잡지 않고 아끼고 다시 아끼며 다가서다가 갑자기 물러나고 잡으려다가 갑자기 놀랐다. 칼을 마치 잡으려고 하다가 다시 놓아두니 허망하게 그 빛을 붙잡았다가 잠깐 사이에 그 옆을 가로챘다.

소매는 칼을 쓸어버리는 듯 보였고 입은 칼을 물려고 하는 듯 보였다. 겨드랑이로 눕고 등으로 일어났다.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젖혔다. 의상과 허리띠에서부터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휘날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자기 기세가 꺾여 열 손가락은 마치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하고 거의 쓰러질 듯하다가 다시 일어났다. 바야흐로 춤사위가 빨라지자 손은 마치 실을 땋은 끈을 흔드는 것 같더니 뒤집듯이 일어났다. 칼은 어디에 숨겼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던지니 칼 두 자루가 마치 서리처럼 떨어졌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공중에서 칼을 낚아챘다. 칼날로 팔뚝을 자로 재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물러났다.

휙휙 바람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서로를 공격하는데 용맹하기가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칼이 몸에 닿는데 한 치도 되지 않았다. 찌를 듯 말 듯 하는 춤사위가 마치 서로 양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번쩍하다가 다시 사라지는 칼은 마치 보이지 않는 듯했다.

끌어당기면서 펴지 않고 묶으면서 풀지 않아 서로 합하면 네 자루의 칼이 되고 나누어지면 두 자루의 칼이 되었다. 칼의 기운이 벽에 비쳐서 마치 거친 파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과 고기의 형상이 되었다.

갑자기 갈라져서 한 명은 동쪽에 한 명은 서쪽에 나누어 섰다. 서쪽의 기생은 칼을 땅에 꽂고 손을 드리운 채 서 있었다. 동쪽의 기생이 달려들어 칼을 날개 삼아 내달아 옷을 찌르고 고개를 들어 뺨을 베었다. 서쪽의 기생은 꼼짝하지 않고 서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용맹한 초나라 사람의 자질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내달려온 동쪽의 기생이 한 번 펄쩍 뛰어 서쪽의 기생 앞에서 용맹을 자랑하고 무예를 과시하다가 돌아갔다. 가만히 서 있던 서쪽의 기생이 동쪽의 기생을 쫓아와 보복하려고 하는데, 마치 말이 히힝 대듯 몸을 번쩍 들어 갑자기 성난 돼지처럼 머리를 숙이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비를 무릅쓰고 바람을 맞으며 달려드는 형상과 같았다.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두 어깨를 갑자기 부딪치고 각자 생각지도 않게 발꿈치를 따라 돌았다. 마치 돌쩌귀와 베틀이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동쪽의 기생이 서쪽에 서 있고 서쪽의 기생이 동쪽에 서 있다. 일시에 몸을 돌리는 바람에 서로 이마가 부딪칠 듯 얼굴이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왔다. 칼이 눈을 어지럽히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혹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그 능숙함을 과시하고, 혹은 허공을 맞이하며 그 자태를 다 보여주었다. 사뿐사뿐 걷다가 훌쩍 뛰어오르는 춤사위가 마치 땅을 밟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잔뜩 폈다가 오므리면 남은 기운이 막힘없이 탁 트이는 듯 했다.

무릇 부딪치는 것, 던지는 것, 나아가는 것, 물러서는 것, 자리를 바꿔 서 있는 것, 떨치는 것, 부여잡는 것, 빠른 것, 느린 것이 모두 음악의 가락에 그 수를 따랐다. 이윽고 쟁그렁 금옥(金玉)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칼을 던지고 절을 하며 춤사위를 마무리했다. 사방의 좌석은 텅 빈 듯 고요하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음악이 끝날 쯤에는 여음(餘音)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소리를 이끌었다.

처음 검무를 시작해 절할 때 왼손은 가슴에 두고 오른손은 전립을 잡아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할 것만 같은 춤사위가 시조리(始條理)이다. 귀밑털이 헝클어지고 옷자락이 뒤집어져 순식간에 굽어보고 우러러보다가 갑자기 칼을 내던지는 춤사위가 종조리(終條理)이다.”  박제가, 『정유각집』, ‘검무기(劍舞記)’

김홍도와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풍속과 풍습을 화폭에 담았던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의 그림 가운데 ‘검무도(劍舞圖)’가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검무를 추는 두 여인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박제가의 ‘검무기’에서도 두 명의 기생이 춤을 춘다. 여기에서 검무를 추는 두 여인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신윤복의 ‘검무도’와 박제가의 ‘검무기’를 함께 보고 있으면 각각 다른 묘미(妙味)를 느낄 수 있다.

신윤복의 ‘검무도’가 검무를 추는 장면의 한 순간을 포착해 찍은 한 컷의 사진과 같다면 박제가의 ‘검무기’는 검무를 추는 전 과정을 촬영한 한 편의 동영상이 담고 있는 내레이션과 같다고 할까? 어쨌든 박제가 산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검무기’를 보면 당시 이덕무와 백탑파의 진경 산문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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