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蕙園) 신윤복…난초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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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蕙園) 신윤복…난초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4.0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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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⑦…조선 대표 화가의 삼원(三園))②

▲ 혜원 신윤복의 대표작 ‘미인도’. 조선 후기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와 순정이 혜원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고운 색감, 정확한 묘사에 의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신윤복은 김홍도·득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신윤복은 당시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성과 연애 그리고 여성’을 그림의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화풍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성과 연애에 대한 본능’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하고 표현해 당시 사회의 금기(禁忌)와 인습(因習)과 관습(慣習)을 철저하게 허문 파격의 화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갖춘 에로티시즘’의 화가라고 하겠다.

여인 풍속화나 연애 혹은 성애(性愛) 풍속화라고 불러도 좋을 신윤복의 그림은 정조 시대 조선 사회가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에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를 보여준다.

비록 일부 사대부나 지식인 혹은 중인 계층에 제한되었지만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신윤복의 파격적인 그림은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개혁군주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과 세도가문의 보수반동정치가 휩쓴 순조(純祖) 이후로는 신윤복처럼 성리학이 극도로 혐오한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사회 계층의 분위기가 아무리 금기를 용납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성과 연애 본능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신윤복과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윤복은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을 부정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다룬 조선 사회 성리학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풍운아였던 셈이다.

오늘날에는 김홍도 하면 신윤복을 쉽게 떠오를 정도로 이 두 사람은 조선 후기 화단(畵壇)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풍속화의 라이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삶이 ‘영광의 나날’이었다면 신윤복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가 임금에서부터 사대부 그리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고의 화가로 존경받던 시절 신윤복은 속화(俗畵)를 즐겨 그린다는 죄목으로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화서에서 쫓겨난 이후 그의 행적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을 만큼 그의 삶과 죽음은 세간의 관심 밖이었다. 김홍도의 삶이 ‘빛’이었다면 신윤복의 삶은 ‘그늘’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금기를 깨뜨린 죄로 비록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신윤복은 김홍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풍속화의 대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신윤복이 단지 김홍도의 그림을 추종하거나 모방하는 수준에 머물렀거나 혹은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그림의 소재와 대상만을 따라 했다면 그저 평범한 화가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리지 않았던 소재와 대상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신윤복의 ‘가치’는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천재 화가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윤복 또한 ‘성과 연애 그리고 여성’에 관한 풍속화를 그리기 이전 김홍도의 화풍(畵風)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신윤복의 화풍이 김홍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미술사가(美術史家)나 화가들의 중론(衆論)이다.

신윤복은 김홍도보다 13살 어렸다. 김홍도가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는다고 해도 그가 영조 즉위 40주년과 칠순 잔치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경현당수작도’ 작업에 참여한 21세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신윤복은 겨우 8세였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은 도화서의 궁중화원이었다. 그는 1781년(정조 5년) 김홍도가 어진 모사 작업을 할 때 함께 참여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였다. 신윤복의 화가 인생도 이러한 가풍(家風)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삶의 진로를 화가에서 찾았던 신윤복에게 젊은 천재 화가 김홍도는 ‘롤 모델’일 수밖에 없었다. 신윤복의 ‘혜원(蕙園)’이라는 호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크게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 단원의 호에서 ‘원(園)’을 따왔던 신윤복은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에서 또 한 자인 ‘혜(蕙)’을 가져옴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삶은 ‘선비’에 있었음을 밝혔다.
먼저 신윤복은 김홍도의 호에서 ‘원(園)’을 따왔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의 호에서 글자를 따와 호를 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김홍도 역시 평소 흠모하던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그대로 따와 자신의 호로 삼지 않았던가?

그리고 ‘혜(蕙)’에 담긴 뜻 역시 김홍도의 호가 지향했던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혜(蕙)’라는 한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난초 혜(蕙)’로 나온다. 그래서 ‘혜(蕙)’를 단순히 ‘난초’라고 하기도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이다. 물론 ‘난(蘭)’과 ‘혜(蕙)’를 엄격하게 구분해 사용한 옛 문헌도 있다.

즉 17세 말 혹은 18세기 초에 저술된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양화(養花)’편에 보면 “줄기 하나에 한 송이 꽃이 피어 향기가 넘치는 것은 ‘난(蘭)’이요(一幹一花而香有餘者蘭也)”, “한 줄기에 예닐곱 송이 꽃이 피지만 향기가 조금 덜한 것은 혜이다(一幹六七花而香不足者蕙也)”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난(蘭)’이든 ‘혜(蕙)’이든 모두 난초의 일종으로 보면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혜(蕙)’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추적해가면서 신윤복이 ‘혜원(蕙園)’이라는 호에 담고자 했던 뜻을 알아보자.

난초는 쉽게 생각해 ‘매난국죽(梅蘭菊竹)’, 즉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다. 매화(梅)는 초봄 찬바람 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풍기며 꽃을 피우고, 난초(蘭)는 깊은 산골짜기와 험한 바위 속에서도 홀로 은은하게 향기를 퍼뜨리고, 국화(菊)는 늦가을 찬 서리를 맞으면서도 깨끗한 꽃을 피우고, 대나무(竹)는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에 더욱 푸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이 같은 특징이 모두 군자(君子)의 고결한 인품과 흡사하다 하여 이들은 예부터 군자를 상징하는 식물이 되었다.

옛말에 ‘사란사형 여송지송(似蘭斯馨 如松之盛)’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난초처럼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무성하다”는 뜻으로 난초와 함께 소나무를 군자에 비유한 말이다. 보는 이 하나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홀로 향기로운 난초가 군자의 넓고 깊은 내면(內面)을 표현한 것이라면 거센 바람과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 무성함을 드러내는 소나무는 군자의 굳센 겉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소나무와 나란히 군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꼽힐 만큼 난초는 사군자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난초가 상징하는 군자(君子)는 다른 말로 하면 곧 ‘선비(士)’를 일컫는다. 밖으로 크게 드러내놓지 않으면서도 고결하고, 청아하며, 은은하고, 우아한 기품과 향기가 선비가 닮아야 할 품격이자 풍모라고 해서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난초’를 선호했다.

이렇게 본다면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비’에서 찾았듯이 난초를 취해 호로 삼은 신윤복의 ‘혜원(蕙園)’ 역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은 ‘선비’에 있었음을 밝혔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다르게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난초’는 선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해서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 유일의 여성 전문 화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신윤복의 그림 속 주인공은 단연 여성이다. 따라서 ‘혜원(蕙園)’이라는 호가 ‘여성’을 담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과 가무(歌舞)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을 묘사했다.
여하튼 김홍도의 정신적 영향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던 신윤복은, 그러나 ‘성과 연애 그리고 여성’을 소재로 삼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김홍도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짜임새있는 구도를 중시한 반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배경을 중시해 상세하게 묘사하는 한편 부드럽고 유연한 필체로 색채(色彩)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는 묘사와 표현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그림의 소재나 대상뿐만 아니라 표현 기법이나 화풍에서도 김홍도가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는 『화사보략(畵史譜略)』이라는 책에서는 “당대의 화원들이 범본(範本)만을 모방하던 시절에 오직 신윤복만이 현실 묘사를 주장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점은 파천황(破天荒)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공이 있었다. 더욱이 그 유려한 선과 아담한 색채로 얻어낸 인물들은 한결 같이 조선 사람의 골격과 표정을 고스란히 살려놓았다”(박상하 저, 『조선의 3원(三圓) 3재(三齋) 이야기』 P208에서 재인용)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신윤복은 당시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불운한 삶과 죽음을 맞아야 했다. 또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윤복은 오늘날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 화가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이는 당대에는 혹평(酷評)과 비난을 받지만 후대에는 호평(好評)과 찬사를 받게 된다는 역사 법칙(?)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분야에서든 다른-훌륭한 혹은 성공한-사람을 추종하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차라리 욕을 먹고 비난을 사고 고통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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