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③경제 신도시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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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③경제 신도시의 건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2.17 07: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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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 화성행궁도 규장각소장본. <사진=문화재청>

[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한정주=역사평론가] 화성은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성은 건설 당시부터 자립형 경제 신도시로 계획되었다.

정조는 1794년 2월 채제공을 총지휘자로 하고 정약용이 작성한 ‘성설(城說)’을 설계 지침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애초 10년을 예상한 공사였는데 불과 2년6개월 만인 1896년 8월 완공을 볼 수 있었다.

공사 기간을 이토록 단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자신들의 과학기술과 경제정책의 총역량을 이곳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성은 설계→공사 및 인력 동원→완공→완공 이후의 도시 기능에서 이전 조선의 대도시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설계와 공사비용을 경제적으로 예측해 계산한 다음 노동력 비용을 절감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각종 과학기술 기기(거중기, 녹로, 유형차)를 개발해 현장에 투입했다.

또한 기존의 성곽 축성에서 널리 사용하던 돌을 대신해서 벽돌을 사용했는데, 이 역시 노동력 비용의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의 효과를 낳았다.

아울러 백성들을 동원해 실시한 이전의 대규모 역사(役事)와는 다르게 전국에서 모여든 빈농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급가모군(給價募軍)’의 방법으로 노동력을 충원했다.

당시 화성 건설에 나선 사람들은 하루 2전5푼의 임금을 지급받았다. 공사 진행 도중 재정상의 문제로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는 방식이 논의되었으나 채제공은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대가를 주고 고용하여 쓴다는 사실을 듣고 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지금에 와서 다시 백성들을 징발해 양식을 싸가지고 부역에 나오게 하면 눈을 흘겨 서로 돌아보지 않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며 적극 반대했다.

결국 백성들을 강제 징발하는 문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사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력을 충당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 사회 곳곳에 퍼져 있던 임금 노동 및 상품 화폐 경제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한 획기적인 경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설계 및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새로운 경제사상과 경제정책의 흔적은 화성을 자립적인 경제 능력을 갖춘 도시로 계획한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채제공은 성곽 축성과 동시에 화성이 대규모 인구 수용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천 준설과 도로(십자가로·신작로) 건설을 시작했다. 또한 화성 주변에 대규모 저수지를 여러 개 쌓아 안정적인 농업 기반과 생계 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북문 밖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쌓은 만석거(萬石渠) 공사로 자갈밭이나 척박한 풀이 무성한 지대를 백성들의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둔전(屯田)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만석거(1795년)를 시작으로 만년제(1798년), 축만제(1799년) 등의 대규모 저수지가 잇달아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농법과 농사기술이 실험되었는데 당시 쌓아 놓은 토대 덕분에 오늘날에도 수원(화성)은 농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성 완공 이후에도 정조와 채제공의 ‘경제 신도시 구상’은 멈추지 않았다. 공사를 완공한 그해 9월부터 곧바로 ‘화성 건설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종합 보고서가 바로 『화성성역의궤』다.

이 책에는 성곽과 각 건물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상세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사와 관련한 공식 문서와 참여 인원, 소요 비용 및 물품, 건축 설계 및 이용 도구, 예산 및 결산에 관한 보고,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에 이르는 기술자들의 명단까지 직종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석공이나 목수, 미장이와 기와장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또 임금의 하루 반나절 분까지 세밀하게 계산해 지급한 다음 기록해 놓은 점이다.

이처럼 채제공이 총책임자로 나서 진두지휘한 화성 건설 현장 곳곳에는 변화하는 사회 경제 현실에 발맞추어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한 그의 정책적 고민과 노력이 깊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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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 2017-03-04 12:57:20
연도날 틀렸네요
1894년이 아니라 1794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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