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일의 여성 경제학자 빙허각 이씨…③실용경제 서적의 주요 관심사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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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일의 여성 경제학자 빙허각 이씨…③실용경제 서적의 주요 관심사 부상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3.16 0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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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가계 경영 능력이 나라 경제의 뿌리로 믿었던 여성 경제학자

[조선의 경제학자들] 가계 경영 능력이 나라 경제의 뿌리로 믿었던 여성 경제학자

[한정주=역사평론가] 『규합총서』는 의식주와 관련해 재화를 생산·소비하고 또 집안 살림살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일종의 실용 경제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빙허각 이씨가 어떤 경제 의식과 경제 철학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현재 남아 전해오는 그녀의 글들을 통해 그 단서를 확인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규합총서』의 ‘봉임칙 자모전(子母錢)’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그녀가 매우 근대적인 경제 의식의 소유자였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돈 ‘전(錢)’자를 양과쟁일금(兩戈爭一金: 두 개의 창이 금을 다툰다는 뜻)이라고 한다. 돈이 있으면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죽을 사람도 살리는 반면 돈이 없으면 귀한 사람도 천하게 되고 산 사람도 죽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분쟁과 송사 역시 돈이 없으면 이기지 못하고 원망과 한탄 또한 돈이 아니면 풀리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돈이란 날개가 없되 날아다니고 발이 없으면서도 달리는 것이다.”

빙허각 이씨는 소론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벌열 중 하나였던 달성 서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비록 48세의 나이에 집안이 몰락해 향촌에 몸을 의탁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신세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당대 최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빙허각 이씨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시대의 변화하는 모습’을 냉철하게 꿰뚫고 있었다. 19세기로 접어든 조선 사회는 이미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아닌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그녀는 직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라는 실용 경제서를 직접 집필한 이유 역시 양반사대부 가문의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기대어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작용한 탓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를 저술한 시기(1809년)를 전후해 농촌 생활과 가정 경제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문제에 관한 서적을 내놓은 실학자들이 여럿 등장했다.

박세당의 『색경(穡經)』,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호수의 『해동농서』, 유중림의 『증보 산림경제』가 『규합총서』보다 이전에 출현했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규합총서』보다 16년 늦게 세상에 나왔다.

18~19세기에 들어와 이렇듯 봇물 쏟아지듯이 여러 실학자들이 농촌 경제과 향촌 생활에 관한 실용 경제서적을 저술한 까닭은 그만큼 이 문제가 양반사대부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앞서 말했듯이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시대의 큰 흐름을 직접 보고 들은 실학자들의 현실 감각과 인식이 낳은 산물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농촌 경제와 집안의 살림살이를 잘 관리하고 경영하는 능력이야말로 나라 경제의 뿌리를 이룬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 책들은 한 개인 혹은 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지학(經世之學)을 근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큰 뜻을 갖추지 않았다면 그토록 두루 널리 옛 서적과 문헌들을 참조·고증하고 또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종합하고 기록하는 일에 온 힘을 쏟지 못했을 것이다.

빙허각 이씨 역시 비록 온갖 속박과 굴레에 갇힌 여성의 몸이었지만 여타 실학의 대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지학을 근본 배경으로 삼아 『규합총서』를 저술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성의 신분과 이름으로 저술을 남기는 일을 매우 꺼렸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탓에 자신의 뜻과 포부를 온전히 다 펴지 못했을 뿐이다.

『규합총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그녀가 품은 큰 뜻과 더불어 여성의 몸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애써 감출 수밖에 없었던 상황 사이에서 겪었을 미묘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기사년(1809년) 가을에 내가 동호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방에 나가 옛 글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山野)에 묻혀 있는 모든 글들을 구해보았다. 손길 닿는 대로 펼쳐보며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옛 사람이 남긴 ‘총명함은 무딘 글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리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버렸을 때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을 지었다. …(중략)… 대체로 부인이 하는 일이란 안방 밖을 나가지 않는 법이다. 비록 과거와 현재를 통하는 식견과 남보다 나은 재주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문자로 표현해 다른 사람에게 보고 듣게 하려고 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속에 품어 간직하는 도리보다 못하다. 하물며 나의 어둡고 어리석음으로 어찌 스스로 감히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하겠는가?

비록 책의 내용이 많지만 모두 건강한 삶을 위해 주의해야 할 것들이고 집안을 다스리는 중요한 방법으로 귀결되니 다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고 부녀자가 마땅히 연구해야 할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서문을 지어 집안의 딸과 며늘아기에게 보여준다.”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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