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도(道)는 한 가지로 일괄해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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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도(道)는 한 가지로 일괄해 말할 수 없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3.25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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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⑤
▲ 김홍도 풍속화도첩의 ‘그림감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⑤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제가는 문체반정(文體反正) 때 신문체인 패관소품체를 즐겨 썼다는 죄(?)를 물어 순정한 고문체에 입각해-일종의 반성문이라고 할 수 있는-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때 지어 올린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 한 편에서 박제가는 경전(經典)의 어구와 문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문체가 패관소품에만 기울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사(故事)까지 인용해 “노나라 술이 박하다 하여 한단을 포위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박하면서 아무런 허물이 없음에도 견책 처분을 받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박제가의 자송문은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 소신 있게 입장을 밝힌 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장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조의 잘못된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신(臣)이 지난해 11월 초10일에 임금님께서 이동직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 한 통을 엎드려 받아보니 그 글이 찬란하게 빛나고 비평은 정중하였습니다. 신은 낮은 고을의 하찮은 벼슬아치에 불과한데 이같이 특별한 대우를 받으니 황공(惶恐)하고 또한 황감(惶感)하여 어느 곳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올해 정월 초3일에 엎드려 규장각의 관련 통지문을 받아보니 여러 문신들이 자송(自訟)의 시문을 지은 사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신에게도 시를 지어 올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문풍이 예스럽지 않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서 탄식하셨습니다. 신처럼 변변치 않은 작은 재주만 있는 사람 역시 발탁해 중용하시고 질서가 있게 잘 이끌어 큰 길을 두루 보여주셨는데, 마치 이끌어주시고 나아가기를 가히 일을 같이할 만한 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이 비록 완고하고 어리석지만 어찌 채찍질하여 독려하거나 스스로 분발하여 오로지 사업의 완성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 세상에 유유히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더러 신의 문장이 명나라의 습속에 물들었다고 헐뜯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를 좇아 일으킨 견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릇 문장가의 글은 시대가 있지만 뜻 있는 선비의 글은 시대가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감히 문장가라고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신이 뜻을 둔 바가 있다면 십삼경(十三經)으로 날줄을 삼고 이십삼사(二十三史)로 씨줄을 삼아 서로 융합시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헤아려 그 옳고 그름을 의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실용(實用)으로 돌아가 힘쓰는 것이 신이 배우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미처 이르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벌써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이에 체재(體裁)을 구별하여 당시(唐詩)의 전성기였던 성당(盛唐)을 종주로 삼고 팔대가(八大家)를 일컬으며 스스로 문장에 능숙한 것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한가로울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을 넘어선 이후로는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의 문장을 표절한 문체나 소설과 희극의 대본 등을 독실하게 믿는 것을 또한 신은 큰 부끄러움으로 여겨왔습니다.

대개 요즈음 사람들은 신의 반 조각 원고조차 실제로는 본 적이 없으면서 무엇을 좇아 신에 대해 의론한다는 말입니까. 어찌 예전에 임금님의 특명에 따라 치른 임시 과거에서 지은 적이 있는 응제(應製)의 글 한두 편을 가지고 합당하지 않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이 글들은 모두 임금님께서 이미 다 읽어보신 것이니 보배로운 묵(墨)은 환하게 빛나 귀중한 고기(古器)인 구정(九鼎)이나 십이율(十二律) 중의 대려(大呂)보다 소중합니다.

이치가 이러하다면 이와 같은 글로 신에 대해 의론하는 것은 거의 노나라의 술이 싱겁다는 이유로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는 옛일에 가깝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전날에 임금님께서 내리신 비지(批旨)를 살펴보건대, 신 등을 가리켜 ‘천리 밖의 우리와는 다른 풍속을 사모하여 초연히 우뚝 솟아 빼어남이 드문 것은 그들 무리의 죄가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성인(聖人)께서 미루어 용서하신 의론입니다. 오늘 임금님과 신하들이 묻고 답하는 자리에서 내리신 교지(敎旨)에서 ‘구태여 잘못을 반성하는 글을 짓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신 말씀은『춘추(春秋)』에서 모든 일을 잘해 나가도록 은밀하게 책망해 갖추게 하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으니, 성인의 말씀은 활시위를 당기기만 할 뿐 그것을 놓아 활을 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간곡히 정성을 다해 신의 뜻을 풀어 주신다면, 신은 바야흐로 은혜를 머금고 영예를 입어 감히 임금님의 뜻을 실추(失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엎드려 규장각의 관문(關文)에서 부연한 글을 읽어보건대 ‘잘못을 고쳐서 스스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잘못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배움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한 것은 진실로 신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같지 않은 것은 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에 비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에 놓은 음식의 자리로 말한다면 서직(黍稷)은 앞에 자리하고 국(羹)과 포(胾)는 뒤에 자리합니다. 맛으로 말한다면 소금으로는 짠맛을 내고, 매실로는 신맛을 취하고, 겨자에서는 매운맛을 가져오고, 찻잎으로는 쓴맛을 냅니다. 지금 짜지도 않고 시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반드시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이 그러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는 어찌하여 서직(黍稷)과 같지 않느냐?’라고 하거나 국과 포에게 ‘너는 왜 상의 앞에 자리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지목을 당한 것들은 실질을 잃어버리고 천하의 맛은 폐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가위와 배와 귤과 유자와 같은 과실, 개구리밥과 흰 쑥과 붕어마름과 물풀과 같은 음식, 날카로운 이빨과 두꺼운 가죽을 가진 들짐승이나 깃털달린 날짐승으로 만든 제사 음식도 쓰임에 적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사람의 입에 맞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선(善)한 것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고 말합니다. 임금님께서 비지(批旨)에서 이른바 ‘하늘을 날고 물에 잠기는 새나 물고기는 그 천성을 저버리지 않고,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은 각기 그 쓰임에 알맞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성인께서 문장을 의론하신 것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무릇 굴원의『이소(離騷)』는 국풍(國風)이 변한 것이지만 천하의 지극한 문장입니다.

주(周)나라 왕실이 천도하지 않았다면 ‘서리(黍離)’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소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삼려대부(三閭大夫 : 굴원)가 추방되지 않았다면 초나라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답하는 소리를 계속 이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치가 올바르지 않자 굴원의 일신(一身)에도 애절한 곡조가 있었고, 주나라의 도읍지에 사는 백성들이 먼저 통탄하는 노래로 둘러싸던 것입니다.

이것이 임금님께서 항상 마음속에 잊지 않고 계시는 사업의 완성을 이루는 기미이고, 천명(天命)을 영원히 하는 것으로 문치(文治)의 근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대개 문장의 도(道)는 한 가지로 개괄해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문장이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그 학문이 깊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독서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 등이 매일같이 착실하게 힘을 쓰며 독서를 폐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신은 삼가 임금님의 말씀을 취하여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 한편을 짓고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를 임금님께 바칩니다.”  박제가, 『정유각집』,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 병인(幷引)’

비록 정조의 명에 따라 자송문을 지어 올렸지만 박제가는 ‘문체’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분명하게 밝혔다. 즉 박제가는 문장하는 사람의 글은 시대가 있는 반면 뜻을 세운 선비의 글은 시대를 초월한다면서 자신은 실용(實用)에 힘쓰는 글을 쓴다는 점을 명백하게 주장했다.

박제가의 자송문은 자신은 실용에 뜻을 둔 글을 쓸 뿐 그 글이 고문체(古文體)인가 신문체(新文體)인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박제가는 여기에서 정조에게 음식에 비유해 문장이란-사물의 천성이 제각각 다른 것처럼-다양한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문장의 도(道)는 한 가지로 일괄해서 말할 수가 없다”라고까지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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