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이고 생활에 유용한 학문·지식 추구한 이익의 글쓰기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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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이고 생활에 유용한 학문·지식 추구한 이익의 글쓰기 철학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5.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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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②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학문과 문장은 한 몸’이라는 철학에 대해 덧붙여 채제공은 ‘사람과 글은 하나’라고 역설했다. 글이란 사람의 말이고, 말이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에 만약 생각을 충실하게 표현한 글을 쓴다면 불후의 명작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학문과 문장’ 그리고 ‘사람과 글’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철학은 그 사람의 학문과 생각과 글쓰기는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익은 실용적이고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과 지식을 추구했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삼아 공부하고 생활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제 생활에 유용한 글을 썼다.

그렇다면 이익의 학문과 생각과 글쓰기를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실학(實學)’이라고 부르는 철학이다.

이렇듯 실용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용도에 바탕을 두고 학문과 생각과 글쓰기를 한다는 이익의 철학은 유학, 특히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어-당시 사대부들이 잡학(雜學)이자 잡문(雜文)이라고 외면하고 배척했던-경제·풍속·천문·지리·문화·공예·종교·음악·산학(算學)·과학기술 등 모든 분야로 학문과 지식 및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평생을 경학과 사서에 파묻혀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유용하고 백성에 이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지식을 탐구하며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사고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실학’이라고 부르는 이익의 철학이었다.

이익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학문과 글쓰기를 가리켜 ‘사설(僿說)’, 곧 ‘자질구레한 학설과 하찮은 문장’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익은 바로 이 ‘사설(僿說)’의 글쓰기 철학을 바탕 삼아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책을 읽고 사색을 통해 얻거나 제자들과 질문하고 답변한 수많은 내용들을 기록하고 써두었다.

이익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이 기록과 글들을 정리해 책으로 편찬했고 이익은 자신의 철학을 담아 여기에다가 『성호사설(星湖僿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이익의 새로운 철학을 담은 학문과 지식과 글쓰기인 ‘사설(僿說)’을 종합하고 집대성해놓았다. 여기에는 천지(天地: 천문·지리·강역)와 만물(萬物: 의식주·곤충 및 동·식물)에서부터 인사(人事: 인간 사회 및 학문·사상)와 경사(經史: 경학과 역사서)와 시문(詩文: 시와 문장 비평) 등에 이르기까지 총 3007항목의 학문과 지식에 관한 이익의 글쓰기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이익이 하나로 추구한 ‘학문과 생각과 글쓰기’의 결정체가 다름 아닌 『성호사설』이다. 실제 여기에는 이익이 제목 붙인 그대로 ‘자질구레한 학설과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유과(油果)와 약과(藥果) 그리고 조과(造果)’에 대해 쓴 글을 읽어보자. 경학(經學)과 사서(史書)에 바탕을 둔 순정(純正)한 문장만을 써야 한다는 시각으로 보자면 이러한 글의 소재는 부녀자나 다루어야 할 하찮은 대상이지 점잖고 위엄을 갖추어야 할 사대부가 취급할 글감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실제 생활에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을 마땅히 학문과 지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아울러 지식인의 글쓰기 역시 그러한 것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한 이익에게는 전통적인 개념의 사대부들이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 것 없다’고 멸시하고 배척한 바로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중요한 소재이자 대상이 된다.

“초혼부(招魂賦)에 “거여(粔籹)와 밀이(蜜餌)에 장황(餦餭)도 있다”고 했는데 왕일(王逸)이 주하기를 ‘장황이란 것은 엿[餳]이다. 쌀가루를 꿀에 타서 구어 만든 것이 거여이고, 기장쌀로 만든 것이 밀이이며, 또 미당(美餳)이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맛을 달게 갖춰서 만든 것이다’ 했다.

그리고 주자(朱子)는 “한구(寒具)라”고 했으며 가산 임홍은 “이것은 세 종류로서 거여는 밀면(蜜麵)을 말린 것이니 10월에 먹는 간로병(間爐餠)이고, 밀이는 밀면보다 조금 윤기가 있는 것이니 칠석(七夕)에 먹는 밀병(蜜餠)이며, 장황은 한식(寒食)에 먹는 한구이다” 하였다.

이 말에 따르면 밀면으로 만든 떡을 기름에 튀겨서 말린 것인데 지금의 박계(朴桂)가 아니고 무엇이며, 조금 윤기가 있다는 것은 엿과 꿀을 겉에 바른 때문이니 지금의 약과(藥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따위를 우리나라 사람은 통칭 조과(造果)라고 하는데 대개 진짜 과일이 아니고 가짜로 만든 것을 세속에서 모두 조과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처음에 밀면으로 과일의 모양을 본따서 만든 것인 듯하다. 그래서 이러한 이름이 있게 되었으며 후인들이 그 모양을 본받아 만드는데 둥글면 그릇에 높이 쌓아 올릴 수 없으므로 모나게 끊어서 만들었지만 과일이라는 칭호는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풍속에도 제향(祭享) 때면 이 조과를 과일 사이에 진설하는 것으로 보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옛날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 나라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잔치상에 우리나라 유밀과(油蜜果)를 썼다 하니 그 맛이 아름다운 것을 알 수 있고, 세속에 전해 온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도곡(陶糓)의 『청이록(淸異錄)』에 “주영왕(周靈王) 이전엔 과품에다 모두 문채를 새기고 향긋하게 만들었는데 형색이 생생한 것과 같았다” 하였으니 이도 조과의 유인 듯하다.

김사계(金沙溪)는 “무릇 미숫가루는 기름에 튀겨서 먹지 않는다[凡糗不煎]”는 말을 인용하여 “제사에 밀과(蜜果)와 유병(油餠)을 쓰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상고해 보니 예의 본의로는 미싯가루를 기름에 튀기는 것은 너무 상없는 것이지만 딴 물품은 옛날부터 기름에 튀기지 않는 것이 없다.

변두(籩豆)에 담는 물품인 이사(酏食)와 삼사(糝食) 같은 것도 모두 쌀가루에 고기를 섞어서 기름에 튀기는 것이다. 또 반찬에 있어서도 사시(四時)로 공궤하는 것이 철을 따라 각각 다른데 만약 기름으로 튀겨서 만들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 맛있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 예전(禮典)에도 약과(藥果)와 중박계(中朴桂)·소박계(小朴桂) 등이 있는데 이를 전혀 제사에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 이 유밀과는 대갱(大羹)이나 현주(玄酒)처럼 깨끗한 뜻이 없고 또 가난한 집으로서는 장만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그럴 듯한 말이다.” 이익, 『성호사설』, 「만물문(萬物門)」, ‘거여 밀이(粔籹蜜餌)’ (이익 지음, 김철희 옮김,《성호사설》, 한국고전번역원, 197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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