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 조식②…대붕(大鵬)의 기상 ‘을묘사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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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②…대붕(大鵬)의 기상 ‘을묘사직소’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4.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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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⑨

▲ 조식이 차고 다녔던 칼.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식은 일상적인 생활과 몸가짐에 있어서도 의리(義理)와 의기(義氣) 그리고 사회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유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하게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이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 :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외물을 끊는 것은 ‘의(義)’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음을 더럽히는 바깥 사물로부터의 유혹이나 욕망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겠다는 뜻으로 칼을 차고 다녔던 것이다.

더욱이 조식은 칼로도 모자라다면서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붙인 방울까지 차고 다녔는데, 이것은 나태하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조식의 제자 중에는 홍의장군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곽재우나 정인홍처럼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한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이렇듯 독특한 학풍과 정신세계를 보였던 조식은 ‘출처(出處)’ 문제에 있어서도 아주 파격적이었다.

그는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위해 성리학을 공부하는 당시의 유학자들을 대단히 혐오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산림(山林)에 거처하며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현실 및 정치적 모순을 고치기 위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지만 단 한 순간도 사회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조식이 품은 ‘대붕의 기상’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난 사건은 명종(明宗)이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을묘(乙卯)는 1555년(명종 10년) 을묘년을 의미한다.

“또한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벌써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멀어져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고액(膏液)이 말라버린 고목(枯木)이 있는데 망연(茫然)히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신하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밤이 늦도록 나랏일에 애쓰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형세가 극한에 이르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酒色)질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대충대충하면서 오로지 재물만 늘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데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궁궐 안의 권신(權臣)은 후원하는 자들을 심는 일을 마치 용(龍)이 연못에서 잡아당기듯이 하고, 외직(外職)의 신하들은 백성들을 갉아먹기를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닳고 나면 한 터럭의 털도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러한 이유로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면서 낮으로 하늘을 우러러본 지가 여러 차례이고, 크게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제하며 밤으로 천장을 바라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백천(百千)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개울이 마르고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 이것은 무슨 조짐이겠습니까? 음악은 구슬프고 소복(素服)을 입었으니 그 형상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겸한 재주가 있고, 그 지위가 정승의 반열에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보잘것없는 한 몸으로 풀과 티끌처럼 하찮은 재주를 가진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위태로움을 부지(不持)할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비호(庇護)할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가 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맣고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의 관작을 받고 그 녹봉을 먹으면서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남명집』 ‘을묘사직소’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왕조국가의 ‘군신(君臣)’ 관계는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의 관계다.

그러나 조식은 달랐다. 그는 임금을 향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언(直言)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임금을 ‘선왕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속의 이욕(利慾)에 초탈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 나태하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겠다는 뜻으로 차고 다녔던 방울 ‘성성자(惺惺子)’.
조식은 평생토록 더러운 권력과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 부귀공명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이름 없는 산림처사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비록 산림에 거처하는 선비였지만 더럽고 어지러운 세상사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개선하는데 자신의 삶과 학문을 바쳤다.

그런 점에서 조식은 현실을 도피해 산림에 은둔한 은사(隱士)와는 완전히 다른 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미덕으로 여긴 왕조의 군신 관계를 거부하고 권력의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현실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글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민암부(民巖賦)’이다.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글은 제목에서부터 불경(不敬)하고 불충(不忠)한 것이다. 민암(民巖)이란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민암부’에서 조식은 임금의 덕목은 백성을 아끼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유월 여름 장마철에 / 거대한 바위가 말(馬)과 같아 / 올라가지도 못하고 / 내려가지도 못하네 / 아아!! / 험악함이 이보다 더한 곳은 없네 / 배가 이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 또한 이로 인해 전복(顚覆)되기도 하네 / 백성이 물과 같다는 이야기는 / 옛적부터 있었으니 / 백성은 임금을 받드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는 존재이기도 하네.” 『남명집』 ‘민암부’

이 때문인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명종조(明宗朝)의 유일(遺逸)’에서 조식에 대한 이러한 기사를 남기기까지 했다.

“산림에 물러나 지냈지만 세상일을 잊지 못해 달이 밝은 밤이면 항상 홀로 구슬프게 가사(歌辭)를 읊고 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일찍이 선비들과 더불어 대화하다가 당시 나라 정치의 잘못과 백성의 곤궁한 삶에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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