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옮겨진 새로운 철학적 사고와 미학적 가치
상태바
글쓰기로 옮겨진 새로운 철학적 사고와 미학적 가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03 0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다시 조선의 18세기로 눈을 돌려 보자. 당시 조선의 ‘지식혁명’을 주도한 두 개의 지식인 그룹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성호 이익과 그 제자들로 이루어진 ‘성호학파’와 연암 박지원을 필두로 한 ‘북학파’이다.

그런데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대개 재야(在野)에 가까웠던 남인 계열이었다면 ‘북학파’의 인물들은 비록 재야 지식인이었지만 당색으로 보자면 집권 세력인 노론 계열 출신들이었다.

대개 노론 하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학파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들 노론 계열 내부에서도 ‘보수적’인 철학적 입장과 ‘진보적’인 철학적 입장의 대충돌이 있었다. 이 논쟁은 훗날 노론 계열에서 북학파라는 진보적인 지식인 그룹이 태동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이 철학적 논쟁을 우리 역사에서는 이른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 부른다.

이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 등과 같은 북학파의 핵심 인물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동등하고 인간과 사물은 변별(辨別)될 수 없다는 철학적 사고에 도달했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 속 ‘허자(虛子)’와 ‘실옹(實翁)’의 대화를 읽어 보면 ‘인물성동(人物性同)’의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허자(虛子) :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인간이 귀합니다. 금수한테는 지혜가 없고 초목한테는 감각이 없으니까요. 또한 이들에게는 예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금수보다 귀한 존재이고, 초목은 금수보다 천한 존재지요.’

실옹(實翁) : ‘너는 정말 인간이로구나! 오륜과 오사(五事)가 인간의 예의라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고 군락을 지어 가지를 뻗는 건 초목의 예의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物)이 천하지만 물(物)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物)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物)은 균등하다.’” 홍대용, 『의산문답』

극단적으로 인간과 짐승이 같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 양반과 노비의 구별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오랑캐와 노비는 중화와 양반의 시선에서 보자면 사람의 본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철학적 사고는 인간과 짐승(사물), 중심과 주변, 문명과 야만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것과 악하고 추악한 것의 주종(主從) 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인성과 물성이 동등하다는 철학적 사고에 이르게 되면 이제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지, 무엇을 아름답고 선하다고 해야 할지 혹은 무엇을 악하다고 추악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함께 가치체계의 일대 전복과 세계관의 대변혁이 일어난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변별(辨別)되지 않는 균등성과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고는 문장 미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비로소 글쓰기의 주제와 소재 및 대상을 세상 만물로 무한정 확장시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문장으로나 미학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우리 주변의 하찮고 사소하고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비로소 미학적 가치를 갖게 된다.

그래서 앞서 ‘동심의 미학’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덕무는 ‘지극히 가늘고 작은 사물에 불과한 개와 고양이와 누에와 개미에게서 무궁한 조화의 이치’를 보았고, 또한 박지원은 ‘지극히 미미한 사물인 풀과 꽃과 새와 벌레에게서 하늘과 자연의 오묘하고 심오한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새로운 철학적 사고와 미학적 가치는 고스란히 그들의 글쓰기 속에 옮겨졌고 문장 속에 녹아들었다.

이때 먼저 살펴보아야 할 책은 이덕무가 평소 자신의 생활 주변 가까이에서 듣고(耳), 보고(目), 말하고(口), 생각한(心)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써두었다가 모아 엮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이다.

먼저 대개 사람들이 혐오하거나 비루하다고 여기는 쥐와 족제비와 벼룩의 움직임을 보고서 ‘자연이란 누가 가르치거나 깨우쳐준 것도 아닌데 제각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서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이치에 도달하고, 그 쥐와 족제비의 삶을 소재로 삼아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조화와 이치를 다룬 한 편의 글을 읽어 보자.

“한 마리 쥐가 닭장에 침입하여 네 발로 계란을 안고 누우면 다른 쥐가 그 쥐꼬리를 물어 당겨서 닭장 밖으로 떨어진다. 그리고는 그 쥐꼬리를 다시 물어 당겨서 쥐구멍으로 운반한다. 또 병에 기름이나 꿀이 있으면 병에 올라 앉아 꼬리로 묻혀내어 몸을 돌려 그 꼬리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 족제비가 온 몸에 진흙을 발라 머리와 꼬리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하고는 앞발을 모우고 썩은 말뚝처럼 사람같이 밭둑에 선다. 그러면 다른 족제비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그 밑에 누워 있다. 짐짓 꿈틀하면 까치가 의심이 나서 재빨리 썩은 말뚝 같이 서 있는 놈 위에 앉는다. 그 놈이 입을 벌려 그 발을 깨문다. 까치는 그때야 족제비의 머리에 앉은 것을 알게 된다.

벼룩이 온 몸을 물면 나무토막을 물고 먼저 꼬리를 시냇물에 담근다. 그러면 벼룩이 물을 피하여 허리와 잔등이로 모여든다. 담그면 피하고 담그면 피하고 하여 차츰 목까지 물속으로 넣는다. 벼룩이 모두 나무로 모이면 나무를 물에 버리고 언덕으로 뛰어오른다.

누가 가르친 것도 본래 언어로 서로 깨우쳐 준 것도 아니다. 가령 한 마리 쥐가 알을 안고 눕더라도 다른 쥐가 그 꼬리를 물고 끌줄을 어떻게 아는가. 한 족제비가 말뚝처럼 섰는데 다른 족제비가 그 아래에 죽은 듯이 누울 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이 자연이 아닌가.”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1’

심지어 이덕무는 “만물(萬物)을 관찰할 때에는 제각각 안목(眼目)을 별도로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귀가 다리를 지나갈 적엔 오직 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집비둘기가 뜰에서 거닐 적엔 오직 어깻죽지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매미가 울적엔 오직 가슴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붕어가 물을 삼킬 적엔 오직 뺨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는 모두 그들 나름의 정신이 발로되는 곳으로 지극한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사물은 모두 따로따로 안목을 갖춰 관찰한다면 그들 각자 나름의 정신이 나타나고 또한 지극한 묘리를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진실로 훌륭한 글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내가 어렸을 때 누각 기둥에 있는 구멍이 크기가 두 되쯤 들 만한데 누르고 붉은 빛깔의 대추알만한 벌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벌들이 꿀을 거두로 모두 나갔을 때 구멍을 더듬어 보니 마른 풀, 헝클어지고 찢어진 종이 등 부드럽고 따뜻한 것들이 있었다. 그 속에 고치만한 검은 덩이가 있는데 뾰쪽뾰쪽한 것이 연방(蓮房) 같았다.

한 방(房)에 반드시 한 굼벵이가 있고 납(蠟)으로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원래대로 넣어 두고 며칠 뒤에 다시 꺼내어 보니 굼벵이는 머리·눈·날개·발을 갖추고 양기름 같이 희었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그대로 넣어 두었다. 며칠 후 또 꺼내 보니 방(房) 마다 꿀이 가득 차고 붉은 밀로 봉하였다가 완전한 벌이 되어 나간 뒤 그 곳에 꽃을 빚어 꿀을 채워 넣은 것이다. 일을 하는 순서가 있고 또 단단하고 치밀하니 사랑스럽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