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가 하찮다고 글까지 하찮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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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하찮다고 글까지 하찮은 것은 아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29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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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⑨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⑨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옥이 ‘담배에 관한 경전(經典)’이라는 자못 거창한(?) 제목을 붙여 쓴 책인 『연경(烟經)』을 집필한 까닭을 적은 글을 읽다 보면 ‘평범’과 ‘일상’의 미학이 때로는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글쓰기 철학인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하나인 음식을 주제로 하여 관련된 사실을 기록해 저서로 남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문창이 『식헌(食憲)』 50권을 지었고, 왕적이 『주보(酒譜)』를, 정오가 『속주보(續酒譜)』를, 두평이 『주보(酒譜)』를 지었다.

또 육우가 『다경(茶經)』을 지었다. 이 책이 나온 뒤로 주강이 그 내용을 보완하는 책을 지었고, 모문석이 다시 『다보(茶譜)』를 지었으며, 채양과 정위가 『다록(茶錄)』을 지었다.

이렇게 마시고 먹는 음식 외에도 품위 있게 즐기는 데 도움을 주거나 지난날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될 만한 저술을 지었다. 범엽의 『향서(香序)』, 홍추의 『향보(香譜)』, 섭정규의 『향록(香錄)』은 모두 향을 사르는 한 가지 주제를 선택해 글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채양의 『여지보(여枝譜)』, 심립의 『해당보(海棠譜)』, 한언직의 『귤록(橘錄)』, 범성대의 『매국보(梅菊譜)』, 구양수의 『모란보(牧丹譜)』, 유공보의 『작약보(芍藥譜)』, 대개지의 『죽보(竹譜)』, 스님 찬녕의 『순보(筍譜)』는 모두 이름난 꽃과 좋은 과일 가운데 소재 한 가지를 선택해 글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저서를 통해 옛날 사람들은 기록할 만한 좋은 점을 한 가지라도 가졌다면 그 물건이 보잘 것 없다고 해서 팽개쳐두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감춰진 사실은 구석구석 뒤져서 모으고, 심오한 비밀은 훤하게 드러낸 뒤에 갖가지 내용을 수집하여 책으로 엮어 후세 사람에게 제시해주었다.

이들 저서는 곳곳에 버려진 사물을 세상에 훤히 드러냄으로써 천하 모든 사람들과 후세의 자손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책을 지은 분들의 마음 씀씀이를 헤아려본다면 그분들의 책이 글을 쓰다가 일시적으로 해본 붓장난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인암쇄어(인庵瑣語)』에서는 ‘숭정(崇禎) 초엽에 담뱃잎이 여송(呂宋)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고, 송완의 『수구기략(綏寇紀畧)』에서도 앞의 책을 인용하고서 명말(明末)에 등장한 재앙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니 담배가 남쪽 오랑캐 땅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된 지 거의 네 번째 병자년(丙子年)을 맞는 셈이다.

조선에서는 이식의 『택당집(澤堂集)』에 ‘남령초가(南靈艸歌)’가 실려 있고, 임경업 장군의 『가전(家傳)』에 ‘금주(錦州)의 전투에 담배를 싣고 가서 곡식과 바꿨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동방에 담배가 등장한 지도 거의 200년이 된다.

농부들은 기장이나 삼을 재배하듯이 담배를 경작하기 때문에 파종하고 재배하는 방법이 골고루 잘 갖춰져 있다. 그리고 흡연자들은 술잔과 술동이를 가까이하듯이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다듬고 만드는 방법이 갖가지로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는 품종이 갈수록 많아져서 명칭과 품질이 각기 달라지고, 지식과 솜씨가 갈수록 발달하여 담배를 피우기 위한 도구가 골고루 갖춰지고 있다.

꽃이 필 때 연기를 내뿜고 달이 뜰 때 연기를 들이마시노라면 담배는 술을 마실 때의 오묘한 맛을 겸비하였고, 파란 연기를 태우고 붉은 연기를 피워내노라면 담배는 향을 사를 때의 깊은 멋까지 갖추고 있다.

담뱃대를 은으로 만들고 담배통을 꽃무늬로 아로새겨 즐기노라면 차(茶)를 마시는 멋진 풍치(風致)까지 간직하였고, 담배 꽃을 가꾸고 담배 향을 말리노라면 진귀한 열매와 이름난 꽃에 비교해도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200여년의 역사에서 문자를 이용해 담배를 기록한 책이 있을 법도 하건만 그런 것을 기록으로 남긴 저술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은 바 없다.

담배가 보잘 것 없는 물건이고 흡연이 중요치 않은 일이라서 굳이 붓을 휘둘러 야단스럽게 저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저술이 있는데도 내가 미처 보지 못했으므로 고루하고 비좁은 내 소견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담배의 출현이 아무래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서 기록할 시간적 여유가 아직 없었고,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붓을 댈 수 있는 기회를 남겨준 것일까?

나는 담배에 심한 고질병을 가지고 있다. 담배를 몹시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즐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남들이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망령을 부려 자료를 정리하여 저술을 내놓는다.

엉성하고 그릇되고 거칠고 더러워서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고 비밀스런 이치를 밝혀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담배를 기록하여 저술한 의도만은 위에서 말한 주록(酒錄)이나 화보(花譜)를 저술한 의도에 거의 부합한다고 자부한다.

경오년(庚午年: 1810년) 매미가 우는 5월 하순에 화석산인(花石山人)은 쓴다.” 이옥, 『연경(烟經)』, 서문(序文) (이옥 지음, 안대회 옮김,《연경, 담배의 모든 것》, 휴머니스트, 2008. 인용)

비록 지금 당장은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고 하찮고 볼 품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인 것 같아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칫 사라져버려 그 흔적조차 알 수 없을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소중한 글이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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