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과 가난이 오직 노동자의 무능 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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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과 가난이 오직 노동자의 무능 탓이라고?
  • 이성태 기자
  • 승인 2014.05.1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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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장경쟁 논리를 최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에서 도태된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어느 날 갑자기 고용주가 어떤 이유를 들어 당신을 해고했다면 그것은 오롯이 당신 자신의 무능함 탓일까?

최근 미국에서는 등장한 ‘요요(YOYO) 경제’라는 신조어는 “네 일은 네가 책임져라”(You’re On Your Own)는 구호를 앞세워 실직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보여준다.

경쟁이 난무하는 정글사회에서 먹잇감으로 전락한 책임을 그 무엇에도 전가시킬 수 없다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른 신조어다.

자유시장경쟁 논리를 최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에서 도태된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여기서 경쟁이란 자본 세력의 재산을 불리는 데 누가 더 이로운 능력을 가졌는지를 겨루는 것이다. 경쟁에서 뒤처져 일자리를 잃거나 처음부터 아예 일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능한 자’라는 낙인이 찍혀 노예처럼 살아간다.

특히 대부분의 노동자들 역시 일자리를 잃거나 처음부터 일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무능함 탓으로 여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인 마이클 패럴먼(Michael Perelman)은 그의 저서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어바웃어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업과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노동자들의 자책과 세상의 통념을 강하게 부정한다.

노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자본주의 시스템과 주류 경제학의 모순을 끄집어내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데 일생을 보낸 페럴먼은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징되는 시장만능주의의 구호를 ‘보이지 않는 수갑’으로 풍자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갑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무능한 존재로 전락시켰는지를 낱낱이 고발한다.

특히 지난 긴 세월 동안 줄곧 노동자들을 사지(死地)로 내몬 자본 세력을 주류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방조하고 교묘하게 옹호해 왔는지를 조목조목 규명한다.

패럴먼에 따르면 정교한 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경제학이 유독 침묵을 지키는 연구 대상이 있다. 바로 ‘노동’이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노동은 본래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노동이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개념으로 비춰지기 위해서는 ‘효용’으로 환원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노동은 효용의 상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다.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임금을 ‘소비’할 때 비로소 경제학자들은 ‘효용’이라는 그들만의 괴상한 용어를 들어 노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경제학자들에게 노동이란 소비의 전제조건이고 노동자란 잠재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노동이 경제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대상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정체성을 노동력(혹은 기술 등)을 파는 상인으로 바라볼 때 경제학자들은 주목한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은 교환함으로써 살아가거나 상인으로 변해가고, 사회 그 자체는 적절하게 상업사회의 형태로 진화해간다”라고 언급했다. 즉 경제가 돌아가는 핵심은 생산보다는 교환(거래)에 있다고 스미스는 여겼다.

이는 세상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거래’로 대체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태생적으로 불온한) 노동의 가치를 아예 처음부터 거세해 버리려는 속내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은 애덤 스미스 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경제학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에 팽배해 있다.

예컨대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는 4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우리는 노동력의 전반적인 개념을 넓혀야만 한다. ‘일자리’(job)가 ‘사업’(project)으로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업무의 영역’(field of work)은 늘어나는데도 사회에는 실직자가 줄지 않는다. 일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노동자는) 이 회사에 자신의 기술을 팔러 온 상인이나 마찬가지다.”

고용관계는 고용자(기업)와 피고용자(노동자) 간의 자유로운 계약으로 맺어진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시장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계약은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비자에게 필요 없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물건이 팔리지 않듯 기업에 불필요한 노동자는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노동의 필요성 여부는 전적으로 노동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한다. 경쟁에서 뒤처진,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노동은 노동자 개개인의 몫일뿐 시장의 결함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불법 고용관계 역시 계약의 논리로 풀어내면 명쾌하게 설명된다는 게 시장주의자들의 입장이다. 피고용자(노동자) 측에서 부당노동행위를 이유로 계약의 해지를 주장하면 된다는 식이다. 즉 계약법상 손해배상의 법리로 해결하면 충분하다는 논리다.(95쪽) 이런 식의 주장이라면 노동법은 처음부터 불필요한 제도가 되고 만다.

경제학자들이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는 수식은 물리학자들의 그것만큼이나 복잡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한지를 드러낸다.

그들의 이론 모형에 등장하는 가계는 항상 이성적인 소비의 주체이고, 기업은 부실이 전혀 없는 합리적인 생산 주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누가 봐도 모순이다. 가계든 기업이든 신이 아니고서는 실수와 결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세상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자본주의의 결함을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혹은 설명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결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부당노동행위를 경제학이 애써 무시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징되는 시장만능주의의 구호를 ‘보이지 않는 수갑’으로 풍자하면서 ‘보이지 않는 수갑’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무능한 존재로 전락시켰는지를 10개의 챕터로 나눠 파헤친다.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딱딱한 주제를 문학과 예술, 신화 등 인문학적 요소를 곁들여 흥미롭게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도 자극한다.

 
그리스 신화(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뿐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수염 난 노예)이 글감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오케스트라에 지휘자가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들어 고용자와 노동자 간의 복잡한 갈등 요소를 묘사하기도 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왜 의도적으로 실업을 조장해 왔는지 등의 비화도 눈길을 끈다.

특히 자본주의가 태동한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당대를 풍미했던 지식인들의 역사적인 발언들을 소개하면서 이를 통해 노동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유니크한 서술 방식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칼 마르크스와 같은 대학자들의 금언(金言)은 시대를 통찰하는 혜안을 갖도록 돕는 반면 존 로크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뜻밖의 망언(妄言)을 접하게 되면 자본주의의 촉수가 얼마나 깊은 곳까지 침투해왔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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