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⑤ 이익·정약용·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 경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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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⑤ 이익·정약용·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 경제사상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7.06 0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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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 유형원이 개창하고 이익과 정약용이 뒤를 이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경제사상은 19세기 막바지 지주-전호(소작) 관계에 기초한 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동학농민혁명으로 표출됐다. 사진은 1894년 3월 동학농민군 4000여명이 전북 무장현에서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기포한 ‘무장기포 상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한정주=역사평론가] 유형원이 『반계수록』에 남긴 사상은 18세기에 활동한 수많은 실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이익, 홍대용, 정약용은 직접적으로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시무(時務)를 알았던 사람은 오직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두 사람뿐이라고 하면서 “율곡의 주장은 대부분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왕정(王政)의 시초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홍대용 또한 이익처럼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 가운데에는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이다”고 하면서 이이와 유형원만이 진실로 ‘경세치용학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실제 유형원이 자신의 개혁 사상을 다듬을 때 가장 깊게 연구한 인물은 다름 아닌 율곡 이이였다. 『반계수록』에서 유형원이 가장 많이 인용한 학설과 주장 또한 이이의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반계수록』을 『고려사』,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통고』와 더불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았다. 정약용은 특별히 유형원이 뛰어난 식견과 경륜을 지녔음에도 산림 속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크게 한탄했다.

그 심경을 토로한 시(詩)가 『다산 시문집』에 실려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뜻이 진지하기로는
반계 유형원을 보았을 뿐이네
세상을 구할 큰 목표는 균전법(均田法)에 있었고
천만 개의 그물눈이 서로 통했네
정확하고 세밀한 생각으로 틈새를 기워가면서
뼈를 깎아 고치고 다듬고 가늠하려 애를 썼네
임금을 보좌할만한 찬란한 재목이었지만
산림(山林)에 묻힌 채 늙어 죽으니
남긴 글 세상에 가득하지만
백성에게 혜택을 끼친 공적 이루지 못해
비명에다 그 사적 새길 만한데
말년에 모진 비난 한 몸에 받고
자손까지 아울러 고난을 겪네

그럼 유형원의 경제사상은 어떻게 후대에까지 계승되었을까? 유형원이 균전론을 통한 토지 개혁을 최초로 주창한 이후 이익과 정약용이 뒤를 좇아 각각 한전론(限田論)과 여전론(閭田論)을 주장하며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사상을 이어갔다.

이익의 한전론은 유형원의 균전론을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일체의 매매 행위를 금지한 일정 면적의 토지 곧 영업전(永業田)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토지 집중과 대토지 소유의 폐해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반면 정약용은 이익과 달리 유형원의 경제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먼저 그는 호구(戶口) 수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1년마다 이를 조사해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토지의 질과 비옥도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자신이 주장한 여전론은 균전론이 지니고 있는 이 같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여전론은 여(閭)라고 하는 구역과 마을 단위를 획정한 후 이 여를 중심으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한 다음 노동량과 경작 기여도에 따라 각자의 분배 몫을 정해 나누는 토지 개혁이었다.

물론 유형원과 이익은 평생을 산림에 묻혀 지낸 재야 지식인이었고 정약용은 인생의 전성기를 유배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사상과 정책이 구체적으로 입안되거나 실행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유형원이 개창하고 이익과 정약용이 뒤를 좇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경제사상은 지주-전호(소작) 관계에 기초한 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농민들의 열망과 의지 탓에 실학파의 사상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19세기의 막바지에 농민의 힘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토지 개혁과 근대화’의 마지막 실험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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