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안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철 벌레는 얼음을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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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철 벌레는 얼음을 의심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7.29 0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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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①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소품문은 산문의 한 장르이지만 산문보다 훨씬 짧고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는 글이다.

특히 소품문은 문장의 길이나 종류에 상관하지 않고 세상 온갖 사물에 대한 사생(寫生)과 그때그때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즉 수상(隨想)을 담아내는데 아주 적합한 글쓰기였다.

그런데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하게 지킨 순정(純正)한 고문(古文)을 문장의 전범(典範)으로 숭상했던 조선시대 내내 글의 형식과 내용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했던 소품문은 잡문(雜文) 혹은 잡저(雜著)로 취급당했다.

예를 들어 17세기 초를 대표하는 대문장가 계곡 장유의 문집(文集)을 보면 ‘사(詞)·부(賦)·표전(表箋)·책문(冊文)·잠(箴)·설(說)·서(序)·기(記)·소차(疏箚)·계사(啓辭)·주본(奏本)’ 등 문장의 형식에 맞지 않는 일종의 수필이나 수상록은 ‘계곡만필(谿谷漫筆)’이라는 별도의 책으로 엮어져 있다.

남초(南草), 즉 담배의 효능을 칭송한 글을 한번 읽어 보자.

“옛날에 남방 사람들이 빈랑(檳嫏)을 중히 여기며 말하기를 ‘술에 취하면 깨게 하고 술이 깨면 취하게 하며 배고프면 배부르게 하고 배부르면 배고프게 한다’하였는데, 이는 대개 빈랑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극찬한 말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남초(南草)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말하기를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라고 하는 등 남초를 극찬하는 말이 빈랑의 경우와 아주 흡사하니, 이 또한 한 번 웃을 만한 일이다.” 장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 ‘남초의 효능을 칭송함(稱頌南草之效能)’

참으로 자유분방한 글이 아닌가?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여름철 벌레는 얼음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는 제목을 단 짧은 글 또한 그지없이 재미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 벌레는 얼음을 의심하니, 이것은 보는 것이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군자라고 하는 이들 역시 조금 이상하다 싶은 자연의 현상이나 변화에 대해서 듣기라도 하면 문득 손을 내저으며 믿지 않고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그 안에 없는 것이 없는 천지(天地)의 위대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 견해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일체 거짓으로 여겨 무시해 버린다면 얼마나 옹졸한 생각이라고 하겠는가.” 장유, 『계곡집』, 「계곡만필」,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 벌레는 얼음을 의심한다(井蛙疑海夏蟲疑氷)’

그러나 이 ‘계곡만필’에 장유가 붙인 ‘자서(自序)’를 읽어 보면 당시 소품문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눈치(?) 보이는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의 글을 가리켜 ‘어디서 얻어들은 하찮은 말이나 자질구레한 이야기’라고 비하하면서 다른 사람이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지만 차마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할 만큼 사대부들에게 소품문을 쓴다는 것은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이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짓는 것을 본업(本業)으로 삼아 왔다. 그러니 평소에 이런 일을 빼놓으면 마음을 쓸 곳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남모르는 근심으로 병을 얻어서 집 문을 굳게 닫아걸고는 세상일을 일체 사양한 채 오직 약을 달여 먹고 침과 뜸을 뜨는 데에 몰두해 왔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담박(澹泊)한 경지에 마음을 노닐면서 입을 막고[塞兌] 빛을 감춰야[葆光] 마땅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만 본성(本性)을 기르고 생명을 돌보는 도리에 그런대로 어긋나지 않게 될 터이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뿌리를 박아 온 습기(習氣)를 하루아침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비록 심사숙고하여 지어 내지는 못했지만 침상에 엎드려 신음하면서 틈이 나는 대로 이따금씩 붓을 잡고는 어디서 얻어들은 하찮은 말이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초(草)잡아 보곤 하였다.

그 가운데에 한두 가지 새로 밝혀낸 것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거의 모두가 남이 먹다 만 음식 찌꺼기이거나 군더더기 말들이요, 길가에서 얻어듣고는 곧장 길에서 말해 버린 것들뿐이니 나의 덕을 저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나 하겠다.

아, 이렇게 하는 것도 마음 쓰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일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마음을 잘못 활용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해 놓고 보니 또 차마 내버릴 수도 없기에 마침내 정서하여 한 벌을 만들어 남기면서 자신의 허물을 아울러 적어 두는 바이다. 을해년(1635년 인조 13년) 4월에 계곡 병부(谿谷病夫)는 쓰다.” 장유, 『계곡집』, ‘계곡만필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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