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경제학파의 개척자 유수원…④“벼슬자리 없는 양반은 다른 생계 수단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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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경제학파의 개척자 유수원…④“벼슬자리 없는 양반은 다른 생계 수단 찾아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8.0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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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맬서스 『인구론』 맹점 60년 앞서 비판한 재야 경제학자
▲ 사방관을 쓴 양반이 자리를 짜를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자리짜기’. 조선 후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양반 중에서 이처럼 일하는 양반들도 생겨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맬서스 『인구론』 맹점 60년 앞서 비판한 재야 경제학자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 ‘양반도 상공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양반상인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수원과 박제가였다.

유수원은 양반 사대부 가운데 빈둥빈둥 놀고먹는 자, 학문에 재주가 없는 자,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 등은 모두 농업이나 상업 혹은 공업 중에서 자신의 생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반 사대부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공업에 나서지 않는 사회·경제적 원인을 두 가지 차원에서 보았다. 하나는 신분적 특권이고, 다른 하나는 상공업 천시였다.

먼저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특권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문벌 지상주의와 더불어 요행(僥倖)으로라도 벼슬자리만 얻으면 된다는 심리를 만든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오로지 “양반 사대부가 되는 것만을 영광으로 여겨 밤낮 없이 미치광이처럼 날뛰고,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다. 나라의 제도가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도록 해 죽기를 무릅쓰고 너나없이 다투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더욱이 상공업 천시는 단순히 상인이나 장인(匠人)들에 대한 차별을 뛰어넘어 양반 사대부들이 상공업에 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회 구조와 심리를 만들어 놓았다.

유수원은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찍이 양반 사대부가의 자손들이 농업 혹은 상공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지한 적이 없다. 그들이 스스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 아닌가?”

그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양반이 천업(賤業)인 농상공(農商工)에 한번 종사하면 후손의 벼슬길이 영원히 막히는데, 이것이 금지하는 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만약 선비가 농상공에 종사한다면 교류와 혼인에 어찌 장애가 없겠는가. 양반 사대부들이 저놈은 이미 상민(常民)이 되었다고 하면서 비루하고 천박하게 여겨 만나지도 못하게 할 텐데, 이보다 더한 금고(禁錮)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라에서 명목상으로 양반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손발을 묶고 굶주림 속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며 자연의 도리겠는가. 더욱이 양반이 농상공에 종사할 수 없어 생기는 피해는 국가 재정에까지 미친다.

양반은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아서 애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라에서 세금을 징수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예부터 모든 나라에는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가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에 사로잡혀 국가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양반들에게 이미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는데 중서인(中庶人)이라고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려고 하겠는가. 이에 나라 경제는 날이 갈수록 잘못될 수밖에 없다.” 『우서』 ‘사민총론(四民總論)’

이처럼 유수원은 농상공을 천시하고 기피하는 양반 사대부를 우대하는 조선 사회의 헛된 명분이 나라 경제와 재정의 뿌리를 흔드는 심각한 폐단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이와 같은 폐단을 구제할 개혁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조선의 백성은 모두 녹아 소멸되고 말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개혁책이란 다름 아닌 양반 사대부라고 하더라도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자라면 반드시 농상공 중에서 일정한 직업과 생계 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양반상공인론’이었다.

유수원은 경제사상의 전략적 목표를 ‘부국안민’으로 삼았다. 그는 이 전략적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려면 당시 조선의 경제 시스템을 ‘중상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을 농업에서 찾은 농본(農本)국가였다. 이 때문에 관청을 제외한 민간의 상공업 활동은 철저하게 억압당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민간의 상품 유통과 시장경제가 활발해지자 이지함과 김육처럼 상공업의 발전을 억제하기보다는 국가 경제에 보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다양한 계층과 학자 그룹에서 나라와 백성이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국강병과 부국안민을 이루려면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상품 유통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경제 시스템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공업을 억압해야 한다는 초기 단계에서 농업과 상공업이 상호 보완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간 단계를 거쳐 마침내 상공업의 발전을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큰 흐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유수원은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을 상공업의 발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른바 ‘중상주의 국가론’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지난 시절 잠곡 김육(金堉)이 상소한 사례까지 들면서 교역과 상품 유통의 사회적 인프라를 적극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육로와 수로를 개척하고 선박과 수레의 이용을 적극 장려해 교역과 상품 유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나라의 풍속과 제도가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게만 된다면 서로 앞을 다투어 수레와 선박이 모여드는 역참을 세워 운송 이익을 얻고 또한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또 사들이고 유통시켜 큰 이익을 얻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가 크게 활성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수원은 이렇게 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거두는 이익에 몰두하던 지주(地主)나 돈과 곡식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업자들도 상공업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상점을 개설하고 물품을 유통시키는 일에 큰 자본을 투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듯 유수원의 이론에는 경제 제도와 시스템의 ‘중상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는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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