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감성·생각·마음·뜻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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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감성·생각·마음·뜻을 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8.0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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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②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남다른 문장의 경지를 추구했던 이들은 대개 고문(古文)의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글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활동했던 명 문장가 김창협 역시 ‘농암잡지(聾巖雜識)’라는 제목의 단 책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그는 문장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채 짧은 글을 통해 학문과 문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보였다.

“똑같은 입김인데 입을 벌려 ‘하하’ 하고 불면 따뜻하고, 입을 오므려 ‘호호’ 하고 불면 차가운 것은 입김이 흩어져 나오느냐 모여 나오느냐, 천천히 나오느냐 급하게 나오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람이 따스하고 서늘한 차이가 있는 것도 이러한 이치이다.” 김창협, 『농암집(聾巖集)』, 「농암잡지」, ‘내편(內篇)’

“나는 밤에 꿈속에서 산수를 노니는 일이 매우 많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뒤로 8~9년 동안 꿈속에서 비로봉(毗盧峰)과 만폭동(萬瀑洞) 사이를 밟은 것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고 이따금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경치를 만나기도 하는데, 이 어찌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주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몇 밤을 연달아 꿈속에서 글을 풀이한다” 하고, 이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 또한 꿈에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산수 꿈을 꾸는 것이 비록 영화와 이득을 꿈꾸는 것과 다르기는 하나 한쪽에 치우쳐 매인 마음의 발로라는 점은 똑같다. 이 점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겠기에 우선 이렇게 써 놓고 보는 바이다.” 김창협, 『농암집(聾巖集)』, 「농암잡지」, ‘외편(外篇)’

특히 김창협은 고문을 배격하는 참신한 글쓰기와 성정(性情)의 자연스러운 발현과 천기(天機)의 유동(流動) 등 새로운 문장 철학을 드러내 보였다.

“시는 성정(性情)의 발현이자 타고난 기지가 동한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이 점을 터득하고 시를 지었기 때문에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을 막론하고 대체로 다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성음과 모습을 모방하고 분위기와 격식에 힘써 옛사람을 따르려고 하는데, 그 성음과 면모가 비록 혹 비슷하기는 하나 기상과 흥취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명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다.” 김창협, 『농암집(聾巖集)』, 「농암잡지」, ‘외편(外篇)’

그런 의미에서 17세기에 등장했던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이나 김창협의 ‘농암잡지(聾巖雜識)’는 개혁군주를 자처했던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야 했을 만큼 새로운 문체이자 글쓰기였던 소품문(小品文)이 대유행했던 18세기의 시대사조를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평범과 일상의 미학’에서 살펴봤듯이 18세기의 시대사조는 고문(古文)의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혁신적인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18세기의 한복판에서 문체와 문장 혁신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글쓰기 철학이 바로 ‘소품의 미학’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소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잠시 일본으로 눈을 돌려보자.

일본에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시(詩)의 전통이 있었다. 다름 아닌 ‘하이쿠(俳句)’가 바로 그것이다. 하이쿠는 5·7·5의 음율(音律)을 지닌 17자(字)로 되어 있는 짧은 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워낙 짧기 때문에 ‘한 줄의 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이쿠를 대표하는 시인들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인 하이쿠가 묘사하는 사계(四季)를 잠깐 감상해보자.

古池や蛙飛び込む水の音 -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 1644~1694)
후루이케야 가와즈 도비코무 미즈노 오토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젖은 물소리)

春雨やものがたりゅく蓑と傘 - 요사 부손(与謝無村 : 1716~1783)
하루사메야 모노가타리 유쿠 미노토 카사
(봄비로구나, 소근대며 걸어가는 도롱이와 우산)

靜かさや岩にしみ入る蝉の声 -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 1644~1694)
시즈카사야 이와니 시미이루 세미노 고에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我星はどこに旅寝や天の川 -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 1763~1827)
와가 호시와 도코니 다비네야 아마노 가와
(내 별은 어디서 한뎃잠 자나, 여름 은하수)

我がでに我をまねくや秋の暮 - 요사 부손(与謝無村 : 1716~1783)
와레가 데니 와레오 마네쿠야 아키노 구레
(내가 나를 손짓해서 불러보네, 가을 저물녘)

盜人にとりのこさねし窓 の月 - 료칸(良寬 : 1758~1831)
누스비토니 도리노고사레시 마도노 쓰키
(도둑이 남겨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宿かせと刀投げ出す吹雪哉 - 요사 부손(与謝無村 : 1716~1783)
야도카세토 가타나 나게다스 후부키카나
(재워달라며 칼마저 내려놓네, 밝은 눈보라)

霰聞くやこの身はもとの古柏 -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 1644~1694)
아라레 기쿠야 고노 미와 모토노 후루가시와
(싸락눈 듣누나, 이내 몸은 그 옛날의 늙은 떡갈나무)

그런데 만약 극도로 압축적인 묘사와 함축적인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하이쿠’라는 시 미학이 일본에 있었다면 조선에는 극도로 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소품문(小品文)’이라는 산문 미학이 있었다고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다만 17자 속에 시상(詩想)을 담아야 했던 하이쿠와는 달리 소품문에는 그 어떤 형식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어떤 격식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소품문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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