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구름은 쉽사리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은 빨리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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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구름은 쉽사리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은 빨리 시든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8.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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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④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익의 문하인 성호학파에서 문장학으로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던 이용휴는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 그리고 강렬한 개성과 세밀한 표현미가 넘치는 ‘소품문’의 미학을 실제 자신의 글쓰기에 가장 잘 구현한 대표적인 문인이다.

이곳에 사는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면 바로 이 글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면서 칠언율시(七言律詩)보다 더 짧은 53자(字)의 글자로 단숨에 써 내려간 듯한 소품문에는 이용휴 특유의 강렬한 개성미가 넘쳐흐른다.

“‘차거(此居)’는 이 사람이 이곳에 산다는 말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옛 문장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이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記文)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쇠 신발이 다 닿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이용휴, ‘차거기(此居記)’ (이용휴 지음, 박동욱‧조남권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소명출판, 2007. 인용)

북쪽으로는 백두산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한라산까지 조선 전역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닌 소문난 여행객인 정란(鄭瀾)이라는 사람을 비웃는 호사가(好事家)들을 향해 정녕 비웃음을 당할 자는 뼛속 깊이 속물근성에 빠져있는 바로 당신들일 것이라는 은미한 뜻을 담고 있는 소품문 또한 기발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뜻과 주장을 밝힐 수만 있다면 구태여 긴 글을 통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가 결코 없다. 이 글 역시 고작 82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내가 세상에 태어났으면 응당 우뚝하게 스스로 서서 그 뜻을 펼쳐야지, 어찌 차마 일곱 척의 몸을 과거 공부나 금전 출납부, 곡식의 장부 속에 파묻혀 살 수 있겠는가? 정(鄭) 일사(逸士)가 삼한의 아름다운 산수를 모두 보고 장차 바다를 건너 탐라에 들어가 한라산을 유람하려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속물근성이 뼛속 깊이 들어간 자로서는 이 일을 비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 년 후에 비웃은 자가 남아 있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가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용휴, ‘바다로 들어가 한라산을 유람하려는 정 일사를 전송하다(送鄭逸士入海遊漢拏山)’ (이용휴 지음, 박동욱‧조남권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소명출판, 2007. 인용)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일찍 요절한 이가 남긴 문집을 읽다가 그 죽음 앞에서 “오색구름은 쉽사리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은 빨리 시든다”고 애석해 하며 쓴 ‘제다화재집(題茶花齋集)’에서는 이용휴의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 소품문의 글자 수는 고작 57자(字)이다.

“이처럼 재주가 뛰어난 명이 짧아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재주는 없으면서 늙도록 수를 누린들 3만6000일 동안 곡식이나 갉아먹는 벌레에 불과하리니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아! 채색 구름은 쉽게 사라지고, 좋은 꽃은 빨리 시든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두고두고 그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많이 보아서 식상해지고 말 것이다.” 이용휴, ‘다화재집에 붙여(題茶花齋集)’ (이용휴 지음, 박동욱‧조남권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소명출판, 2007. 인용)

꽃의 향기가 같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비도 종류에 따라 좋아하는 꽃이 다르고 또한 거들떠보지도 않는 꽃도 있다면서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나비가 꽃을 그리워한다’는 말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일 뿐 참된 이치를 담고 있지 않다는 ‘기화접(記花蝶: 꽃과 나비를 기록한다)’은 비록 짧은 글이지만 끊임없이 ‘참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회의하고 탐구했던 이용휴의 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뜰 앞에 원추리, 패랭이, 접시꽃이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 원추리에는 노랑나비, 푸른 나비, 호랑나비가 날아들고, 패랭이꽃에는 흰나비가 날아드는데 접시꽃은 나비가 모두 지나치고 돌아보지 않는다. 대개 꽃의 향기가 같지 않고 나비의 성질이 각각 들어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충 나비가 꽃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꼼꼼하지 못한 말이다.” 이용휴, 『혜환잡저』, ‘꽃과 나비를 기록한다(記花蝶)’ (이용휴 지음, 박동욱‧조남권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소명출판, 200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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