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려고 하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글들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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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려고 하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글들이 쏟아진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9.02 0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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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기묘와 기궤의 미학’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장학에서 이용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덕무 역시 ‘소품문’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이덕무의 소품문들을 읽고 있자면 시간을 두고 일부러 꾸미려거나 인위적(人爲的)으로 짓고자 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 같은 기이한 문장들이 사람의 마음을 ‘맑은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사물을 대하는 어느 한 순간 떠오르는 직관적 감성과 사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올 것 같지 않은 섬세한 묘사와 표현들이 아주 짧은 글 속에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의 대표적인 소품문 모음집인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를 읽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짧은 글들은 모두 특별한 목적도 이유도 없이 느낌이 오고 생각이 나고 마음이 가고 붓이 가는 대로 써내려간 것이다. 마치 잘 하려고 하지 않아야 잘 하게 되는 것처럼 잘 쓰려고 하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글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 듯하다.

“세상사에서 벗어난 선생이 있었다. 만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깊은 산 속의 눈 덮인 초옥에서 등불을 밝히고 주묵(朱墨: 붉은 색의 먹)을 갈아 서책에 동그랗게 점을 찍는다. 오래된 화로에서는 향기로운 향연(香煙)이 하늘하늘 피어올라 허공으로 퍼져 화려한 공 모양을 만든다. 가만히 한두 시간 가량 감상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어 웃곤 한다. 오른쪽에는 매화가 일제히 꽃 봉우리를 터뜨리고, 왼쪽에는 차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솔바람과 회화나무에 깃든 빗소리는 더욱 정취를 돋운다.

눈 속 고각(高閣)은 단청이 더욱 밝다. 강 가운데 가냘픈 피리 소리의 곡조가 갑자기 높아진다. 마땅히 밝은 색깔과 높은 소리에 구애받지 말고 먼저 흰 눈과 맑은 강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몸소 풀무질하던 혜강(嵇康)과 나막신을 좋아했던 완부(阮孚)에게 한번 눈길을 돌려서 이들 호걸(豪傑)이 마음 붙였던 것을 기롱하거나 책망한다면, 그 사람은 조금도 세상사에 밝지 못한 자이다. 이러한 사람의 가슴속에 과연 혜강의 풀무질과 완부의 나막신에 담긴 뜻이 있겠는가? 내가 평생 동안의 일을 돌이켜보니, 다른 사람의 뜻을 얻은 문장을 읽게 되면 미친 듯 절규하고 크게 손뼉을 치며 마음이 가는 대로 붓을 움직여 품평하였다. 이 역시 우주 간의 한 가지 유희(遊戱)라고 하겠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나는 마땅히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을 것이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한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색(五色)의 실을 따뜻한 봄날 햇볕에 쬐어 말려서 연약한 아내로 하여금 수없이 단련한 금침(金針)을 지니고 내 지기(知己)의 얼굴을 수놓게 해 기이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높게 치솟은 산과 한없이 흐르는 물 사이에 걸어놓고 서로 말없이 마주하다가 해질녘에 가슴에 품고 돌아올 것이다.

3월 푸른 계곡에 비가 개고 햇빛은 따사롭게 비춰 복숭아꽃 붉은 물결이 언덕에 넘쳐 출렁인다. 오색 빛 작은 붕어가 지느러미를 재빨리 놀리지 못한 채 마름 사이를 헤엄치다가 더러 거꾸로 섰다가 더러 옆으로 눕기도 한다. 물 밖으로 주둥아리를 내밀며 아가마를 벌름벌름하니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로다. 따사로운 모래는 맑고 깨끗해 온갖 물새 떼가 서로 서로 짝을 지어서 혹 금석(錦石)에 앉고, 혹 꽃나무에서 지저귀고, 혹 날개를 문지르고, 혹 모래를 끼얹고, 혹 자신의 그림자를 물에 비춰본다. 스스로 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 속에 감춘 칼과 마음속에 품은 화살과 가슴속 가득 찬 가시가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항상 나의 뜻을 3월의 복숭아꽃 물결처럼 하면, 물고기의 활력과 새들의 자연스러움이 내게 모나지 않은 온화한 마음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봄비는 윤택해 풀의 싹이 돋는다. 가을 서리는 엄숙해 나무 두드리는 소리에 낙엽이 진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가난 탓에 반 꾸러미의 엽전도 모으지 못하는 처지에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고, 어리석고 둔해 단 한 권의 책도 다 읽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 모든 서책을 다 보려고 한다. 진실로 탁 트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주 어리석은 자라고 하겠다. 아아, 이덕무야!! 이덕무!! 네가 바로 그렇지 않느냐.

우산이 떨어져 우뢰를 맞으며 깁고, 섬돌을 붙들어 낡은 약절구를 안정시키고, 새들을 문하생으로 삼고, 구름을 벗 삼아 산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암(炯菴 : 이덕무의 호)의 생활을 두고 ‘편안한 삶’이라고 한다. 우습고, 우습고 또한 우습구나!!

동이를 묻고 물고기를 기른다. 열흘이 지나도록 물을 갈아주지 않았다. 이끼가 끼어 마치 청동처럼 변해 사람의 옷을 물들일 지경이다. 금붕어도 온통 연록색이 되었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비실비실 헤엄치고 있다. 시험 삼아 깨끗한 샘물로 갈아주고 먹잇감으로 붉은 벌레를 던져주었다. 마치 토끼를 쫓는 매처럼 생기가 돈다. 물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내고 서서 사람을 향해 말을 하려고 한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 콩 꽃 핀 울타리 가를 걷다가 기와 빛을 띤 거미가 실을 뽑아 거미줄을 엮는 모습을 보았다. 그 신묘한 모습이 부처와 서로 통함을 깨달았다. 실을 뽑고 실을 당기며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이 너무나 기막혔다. 때로는 멈춘 듯 하다가 때로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엮기도 했다. 마치 사람들이 보리를 심을 때의 발놀림이나 거문고를 튕길 때의 손놀림과 같았다.

봄 산은 신선하고 산뜻하다. 여름 산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가을 산은 여위어 수척하다. 겨울 산은 차갑고 싸늘하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빙긋이 웃는 것은 뒤쪽까지 환히 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 거울의 뒤쪽을 보지만 단지 까맣고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왜 까맣고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기묘하다, 거리낌이 없어서 막힘도 없구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비록 글 읽는 선비라고 하더라도 한 꾸러미의 엽전을 아끼려고 하면 숨구멍이 꽉 막히게 되고, 비록 저자거리의 장사치라도 가슴속에 수천 자의 글을 지니려고 하면 눈동자가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氣色)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의 가슴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오는 밤에 좋은 벗이 오지 않는다.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할까?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이 나의 귀일 뿐이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구경하는 이 나의 눈일 뿐이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구나. 다시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어울리면 된다. 책이 없을 경우에는 구름과 안개가 나의 벗이 되고, 구름과 안개조차 없다면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나는 비둘기에게 내 마음을 의탁한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없으면 남쪽 동네의 회화나무와 벗 삼고, 원추리 잎사귀 사이의 귀뚜라미를 감상하며 즐긴다. 대개 내가 사랑해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면 모두 나의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빼어나게 우뚝 솟은 푸른 봉우리와 싱싱하고 산뜻한 하얀 구름의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을 오랫동안 부러워하다가 한 손으로 잡아당겨서 모두 먹으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자 양 볼과 어금니 사이에서 이미 군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서 이보다 더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이덕무,『청장관전서』,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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