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상태바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9.19 0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⑧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⑧

[한정주=역사평론가] 지봉 이수광은 『지봉유설』의 ‘문장’편에서 일찍이 “시나 문장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칠 줄 알아야 좋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앞서 살펴본 이덕무의 ‘선귤당농소’처럼 서너 줄의 문장은 물론 한 줄의 문장에 그쳐도 훌륭한 글이 나온다.

이렇듯 소품문의 미학 중 하나인 ‘간결과 여백의 미학’을 잘 보여준 또 다른 이들을 꼽자면 18세기 조선의 생활사를 가장 자세하게 보여주는 기록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일기 『흠영(欽英)』의 저자 유만주와 홍길주 그리고 19세기 초·중반 활동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조희룡이다.

먼저 유만주는 이덕무처럼 맑은 기운과 빼어난 기상, 세밀한 표현과 심오한 뜻이 돋보이는 아주 많은 분량의 ‘청언소품(淸言小品)’을 남겼다.

“대기만성(大器晩成), 이 한 마디 말이 수많은 용렬한 선비들 죽였다고 옛사람이 말했다. 그 말이 참으로 맞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더불어 맑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눈속이 어울리고, 빗속이 어울리며, 달빛 속이 어울린다. 비가 눈보다 낫고 달이 비보다 낫다.

꽃이 핀 동산, 달이 뜬 다락, 바람 아래 소나무, 눈이 쌓인 골짜기 모두가 생활에서 여가를 즐길 장소이다.

인간 세계에는 천 개, 백 개의 층계가 있다. 가장 나은 것은 벗어나는 것이요, 그 다음은 지나가는 것이며, 그 다음은 희롱하는 것이다.

미인은 구리거울을 사랑하고, 명사는 예스런 벼루를 사랑하며, 장군은 좋은 말을 사랑한다. 나라면, 노인은 손자를 사랑하고 속물은 동전을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고락(苦樂)! 이 두 글자는 인생에서 던져버리려 해도 던져버리지 못한다. 물리쳐버리려 해도 물리쳐버리지 못하므로 목숨을 걸고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짓거리를 쉬지 못한다. 세계는 견디고 참아야 하는 곳, 그럴 수 있는 자 몇이나 될까?

이 세계는 욕망의 세계다. 기(氣)가 뭉쳐서 욕망으로 시작하여 욕망으로 끝난다. 이 세계를 뛰어넘고 벗어나는 자는 겨우 몇이고, 머리를 들이밀다 사라지는 자는 넘쳐난다. 이것이 정녕 조물주가 이 세계를 만든 이치다.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한다면 말이 품격을 잃은 것이요, 행해선 안 될 것을 행한다면 행동이 품격을 잃은 것이다. 다른 것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인간으로서 가장 하기 쉬운 것이 품격을 잃는 것이요,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품격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호숫가에 살았는데 몹시 가난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대는 한 이랑의 밭도 없으니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으리요?’ 하고 물었다. 그의 대꾸는 이랬다. ‘내게는 호수 삼만 이랑이 있지요. 그걸로 내 마음을 맑게 하기에 괴로움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반문했다. ‘호수가 그래 그대의 소유물인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려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나요?’ 이 말이 너무도 시원하여 속됨을 벗어났다.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는 무구어세(無求於世), 이 네 글자는 큰 안락함을 얻는 선가(仙家)의 비결이다. 오호라! 뜬 인생에서 견디고 참아야 할 수많은 일들은 모두가 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생고생 휩쓸려가느라 쉴 틈이 없다.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이 내 온갖 행위가 이루어진다면 편의롭고 자유자재하여 소요하며 지내리라. 그렇게 백 년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세계는 견디고 참아야 하며, 그 결함을 슬퍼하는 것이다.” 유만주, ‘청언 소품(淸言小品)’ (안대회 지음,《고전산문산책》, 휴머니스트, 2008. 인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