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⑤ 권문세족 핍박 피해 은거했던 삼각산 ‘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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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⑤ 권문세족 핍박 피해 은거했던 삼각산 ‘삼봉’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5.2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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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⑩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조운찬씨가 ‘삼각산 삼봉’설의 세 번째 근거로 들고 있는 글은 『삼봉집』 제2권 ‘오언율시(五言律詩)’ 편에 실려 있는 ‘산중에서(山中)’라는 시(詩) 두 수(首)다.

“산중에서 병들어 누워 있다가 새로이 일어나니 / 어린아이가 내 얼굴보고 쇠약해졌다 하네 / 밭농사 배워서 몸소 약초 가꾸고 / 집 이사해 손수 소나무를 심었네 / 해 저물녘 종소리 어느 절에서 오는지 / 들불은 숲 너머 방앗간에서 / 산중에 사는 그윽한 맛을 알게 되어 / 이제는 모든 일에 게으름을 피우네.”

보잘 것 없는 나의 삶터 삼봉(三峰) 아래인데 / 돌아와 보니 송계(松桂)의 가을이네 / 집안이 가난하니 질병을 다스리는데 방해가 되나 / 마음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근심을 잊네 / 대나무를 지키려고 길을 돌려 열고 / 산이 어여뻐 조그마한 누각을 세웠네 / 이웃의 스님이 찾아와 글자를 묻고선 / 해가 다 저물도록 서로 떠나지 않네.”

1375년 고려 조정에서는 원(元)나라의 사신을 맞는 문제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대립을 겪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선봉장이었던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주장한 권신(權臣) 이인임과 크게 충돌했다. 그런데 이인임이 신진사대부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明)나라로 보내버리겠다”고 항거하며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일로 권문세족의 미움을 산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 정도전이 나주 유배시절 머물렀던 초가
3년 후인 1377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선영이 있는 경북 영주로 가서 4년간 생활하다가 경상도에 왜구가 창궐하는 바람에 영주를 떠나 삼봉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지은 시가 바로 ‘산중에서(山中)’인데, 특히 둘째 수(首)에는 ‘삼봉 아래’ 정도전의 옛집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

조운찬씨는 이 시에 묘사되어 있는 삼봉 아래 정도전의 옛집은 “산봉우리 아래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깊은 산중이다. 강물이 휘감아 도는 도담삼봉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운찬씨가 ‘삼각산 삼봉’설의 근거로 내세운 정도전의 글은 『삼봉집』 제2권 ‘오언율시’편에 실려 있는 ‘집을 옮기면서(移家)’라는 시다.

“오 년에 세 번이나 살만한 곳을 찾아 옮겨 다녔는데 / 금년에 또 다시 거처를 옮겼네 / 들은 넓은데 띠풀로 두른 집은 조그마하고 / 산은 길지만 고목(古木)은 듬성듬성하네 / 경작(耕作)하는 사람과는 서로 성(姓)을 묻는데 / 옛 친구와는 편지 왕래마저 끊어졌네 / 하늘과 땅이 마땅히 나를 용납해주니 / 표표(飄飄)히 가는 대로 맡겨두네.”

그런데 이 시에는 정도전의 다른 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긴 문장의 주석(註釋)이 달려 있다. 물론 이 주석은 정도전 자신이 아니라 『삼봉집』을 편찬한 옛 사람이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달아놓은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공(公)이 삼봉재(三峰齋)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 그 지방 사람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있었는데, 이러한 일을 미워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해버렸다. 공은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고 부평부의 남촌(南村)에 거처했다. 그런데 전임 재상 왕모(王某)가 그 땅에 별장을 지을 욕심에 다시 재옥(齋屋)을 철거했다. 이에 공은 또 김포(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년(1382)”

이 주석은 정도전이 1382년 이전 5년 간 권문세족의 핍박을 피해 삼봉재(三峰齋)에서 부평으로, 다시 김포로 옮겨 다녔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조운찬씨는 “문제는 삼봉재의 위치를 단양으로 보느냐, 삼각산으로 보느냐인데 임시거처를 찾아 전전했던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본다면 부평이나 김포 인근인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는 의견을 첨부했다.

그리고 이상 네 종류의 시(詩)와 거기에 달린 주석 등을 종합하면서 조운찬씨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삼봉은 개경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며, 파주 임진강에서도 멀지 않는 곳이다. 또 삼봉을 중심으로 오 년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은 삼봉, 부평, 김포로 한강 주변 지역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봉’은 삼각산, 즉 오늘의 북한산을 지칭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삼봉집』
아울러 그는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이뤄졌다 해서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렀는데, ‘삼봉(三峯)’으로 약칭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

리고 삼각산을 ‘삼봉’이라고도 불렀다는 증거를 정도전의 스승이었던 목은(牧隱) 이색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시는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稿)」 제4권에 실려 있는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다.

“태초에 삼봉(三峰)이 깎여 나왔는데 / 하늘을 가리킨 선인장(仙人掌)은 천하에 희귀하네 / 무성한 소나무 그림자에는 해와 달이 비키었고 / 짙고 얕은 바위의 자태에는 연기와 안개 뒤섞였네 / 어깨 솟은 나그네는 나귀 타고 가버렸는데 / 환골(換骨)하여 신선 된 어떤 사람은 학(鶴)을 타고 돌아가네 / 어렸을 때부터 이미 진면목(眞面目)을 아는데 / 사람들은 등 뒤에서 옥환(玉環)이 살쪘다고 말하네.”

이 시의 첫 구절인 “태초에 삼봉(三峰)이 깎여 나왔는데”가 정도전이 살던 당시 ‘삼각산’과 ‘삼봉’이 함께 쓰였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그런데 시의 둘째 구절인 “하늘 가리킨 선인장(仙人掌)은 천하에 희귀하네” 역시 앞서 필자가 주장한 ‘화산(華山)’이 ‘삼각산’이라는 증거다.

선인장(仙人掌)은 중국의 화산(華山)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인데, 당시 삼각산을 화산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이색이 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화산이 삼각산이라는 증거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과 함께 수학했던 도은(陶隱) 이숭인이 지은 ‘삼봉의 은자(隱者 : 정도전)에게 부치다’라는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올의 머리칼 마냥 희미하게 보이는 남쪽의 화산(華山) / 산중(山中) 그윽한 거처에는 낮에도 사립문 닫혔겠지 / 그 마음 어찌 세상을 피해 숨고자 했겠는가 / 본시 세상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 뿐이네.” 『도은집(陶隱集)』, ‘삼봉의 은자에게 부치다(奇三峰隱者)’

이렇듯 정도전의 시는 물론이고 고려 말기의 대학자였던 이색이나 이숭인의 시에서도 모두 ‘삼봉(三峰)’이 강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도담삼봉’이 아닌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삼각산 삼봉’임을 분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전해오는 전설이나 설화는 정도전의 호가 ‘도담삼봉’이라고 하지만 정도전 자신과 그와 시대를 함께 했던 스승과 벗들이 남긴 문헌은 그의 호 ‘삼봉’이 ‘삼각산 삼봉’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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