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⑦ 불온하고 위험한 서적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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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⑦ 불온하고 위험한 서적 ‘맹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6.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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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⑩
▲ 맹자 초상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정도전이 품은 뜻과 철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유학을 이념으로 삼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정도전의 전기(傳記)을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뜻과 정치철학을 품은 최초의 시기는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喪)을 연이어 당해 경북 영주에서 여묘살이를 할 때였다.

이때 그는 훗날 정적(政敵)이 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동심우(同心友 : 마음을 함께 하는 벗)’라고까지 부르며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 관계를 맺었던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孟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 정도만 읽을 만큼 정독(精讀)하고 숙독(熟讀)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상을 모두 마친 후인 1369년 정도전의 발길이 향한 곳이-앞서 ‘삼봉에 올라 경도(개경)의 옛 친구를 추억하며’라는 시에서 살펴보았듯이-다름 아닌 삼각산(三角山) 혹은 삼봉(三峯) 아래 옛집이었다.

정도전은 1362년(공민왕 11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다음해 충주(忠州) 사록(司祿)에 임명되어 벼슬길을 시작한 이후 1364년 전교주부(典校主簿)와 임금의 비서에 해당하는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에 올랐다. 그런데 공민왕이 신돈을 중용하자 크게 실망해 삼각산의 옛집으로 낙향해버렸다.

경북 영주에서 부모상을 마치고 다시 삼각산의 거처로 돌아온 정도전은 1370년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재차 벼슬길에 나섰고 다음해에는 태상박사(太常博士)로 특진했다. 이 해(1371년) 정도전이 한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유가 되었던 신돈이 공민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공민왕의 성균관 진흥 정책으로 큰 신임을 얻은 정도전은 1374년 공민왕이 시해당할 때까지 비교적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환관들의 손에 시해당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권신 이인임이 득세하면서 정도전은 크나큰 정치적 시련을 맞게 된다. 1375년(우왕 1년) 이인임과 권문세족의 친원(親元) 정책에 맞서다 전라도 나주로 유배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도전은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部曲)에 머물면서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체감했고, 이것은 훗날 그가 고려를 멸망시켜야 할 정치적 명분의 하나로 삼은 ‘민본(民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서울 종로구청 민원실 옆의 정도전 집터 표지석
1377년 유배지에서 풀려나 경북 영주로 갔지만 왜구의 난리 때문에 그곳에서도 거처하지 못하게 되자 정도전은 마지막으로 삼각산 아래 옛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정도전은 예전에 이인임이 자신에게 가한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개경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금족령(禁足令)이 내려져 있었다.

정도전의 연보(年譜)라고 할 수 있는 『삼봉집』의 ‘사실(事實)’ 편에서는 삼각산 아래 ‘삼봉재(三峯齋)’라 이름 붙인 거처에서 그가 글을 가르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도전은 1383년 가을에 변방의 함주막사(咸主幕舍)로 이성계를 찾아가기 전까지 삼각산 삼봉재에서 부평으로, 다시 김포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6여년 간 망명객 아닌 망명객으로 생활했다.

필자는 경북 영주에서 삼각산의 삼봉 아래 옛집으로 돌아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간 이 6여 년 간이 정도전의 삶과 정치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삼각산의 삼봉재에서 지낼 때 예전 탐독했던 『맹자』를 통해 이미 기둥뿌리까지 썩어버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과 철학을 갈고 닦았다.

유학사에서 볼 때 맹자의 사상은 두 가지 점에서 독창적이다. 그 하나가 이른바 역성혁명이라고 하는 ‘천명개혁(天命改革)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民)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은 사직(社稷 : 국가)이고, 가장 마지막이 임금(王)이라고 한 ‘민본(民本) 사상’이다.

이러한 맹자의 독창적인 사상 때문에 예부터 일부 제왕들은 『맹자』를 불온하고 위험한 서적으로 여겨 금서(禁書)로까지 지정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맹자』를 수십 수백 번 되풀이해 탐독하면서 이 두 가지 사상을 체득했고 이미 손댈 수 없을 만큼 부패해버린 고려를 역성혁명을 통해 멸망시키고 민본 사상을 구현할 새로운 유교 국가를 세울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 철학과 정치 구상이 준비가 되자 비로소 정도전은 자신과 힘을 합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적임자로 찍은(?) 이성계를 찾아갔던 것이다.

▲ 맹자의 독창적인 사상 때문에 예부터 일부 제왕들은 『맹자』를 불온하고 위험한 서적으로 여겨 금서(禁書)로까지 지정했다.
『삼봉집』의 ‘사실(事實)’편에서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인용해 이때 처음으로 만난 정도전과 이성계의 대화와 그 속에 숨은 뜻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해년(1383년, 우왕 9년) 가을에 공이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를 따라 함주막사(咸州幕舍)에 갔다. 그때 태조는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였다. 태조의 호령이 엄숙하고 병사의 대오가 정돈되어 질서가 있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아뢰기를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러한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태조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였다. 공(公)은 ‘동남쪽으로 나아가 왜적을 물리친다는 말입니다’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진영(陣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거기에 시를 남기고 싶다고 청했다.
소나무를 하얗게 깎은 다음 ‘아득한 세월 한 그루 소나무는 / 청산(靑山)에서 몇 만 겹 동안 자랐네 / 다른 해가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있겠지 /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따르겠네’라고 적었다. 대개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고 그 뜻을 취한 것이다.”

이 기록대로 정도전은 삼각산 삼봉재에서 야심만만하게 ‘역성혁명과 민본사상’의 정치철학과 이 정치철학을 구현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치적 구상을 마무리한 다음 ‘천명(天命)의 소재’를 찾아 이성계를 만나러 머나먼 변방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의 삶과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뜻이 담겨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삼각산 아래 삼봉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도전의 호가 ‘도담삼봉’이 아니라 ‘삼각산 삼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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