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정조대왕과의 인연이 만든 조선 최고의 개혁 경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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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정조대왕과의 인연이 만든 조선 최고의 개혁 경세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1.30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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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①
▲ 다산 정약용(왼쪽부터)을 조선 최고의 개혁 경세가로 만든 정조대왕과 성호 이익.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①

[한정주=역사평론가] 대개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걸출한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일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러한 인물을 가장 잘 소개하는 표현이 독자들에게 때로는 매우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고서 굳이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자면 아마도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經世家)’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약용이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가 되기까지에는 또 다른 걸출한 역사적 인물 두 사람과의 인연과 만남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이다.

정약용이 성호 이익의 실학(경제학)과 조우한 시기는 그의 나이 16살 무렵인 1777년이다. 물론 정약용은 생전에 이익의 가르침은커녕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났는데 이익은 그 다음해인 1763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약용과 이익은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우다)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이익의 학문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다.

정약용의 매형이기도 한 이승훈은 이때 자신의 외삼촌이자 이익의 종손(從孫)인 이가환을 소개해주었다. 이가환은 당시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성호학파’의 중심인물이자 대학자였다.

이가환과 성호학파의 지식인 그룹을 통해 이익의 실학(경제학) 세계를 접한 정약용은 비로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 사회개혁에 대한 구상을 통한 경세치용(經世致用), 서양의 과학기술 및 신문명을 수용하는 열린 마인드를 갖출 수 있었다.

이가환과 성호학파 지식인과 함께 토론하고 또 이익이 남긴 『성호사설』 등의 유고(遺稿)들을 공부하면서 정약용은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의 기틀을 잡아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고 말했다.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를 사숙함으로써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치기 어린 유생에 불과했던 정약용에게 실학의 정신과 방법을 새겨주어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의 큰 꿈을 품게 한 사람이 성호 이익이라면, 그와 같은 큰 꿈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었다.

정약용은 나이 22세(1783년) 때 소과(小科)에 합격한 유생들이 임금에게 사은(謝恩)하는 행사가 열린 창경궁 선정전에서 정조대왕을 처음 만났다.

당시 정조대왕은 정약용보다 10살 많은 32세였다. 이때 정조대왕은 정약용에게 얼굴을 들라 하며 나이를 묻는 등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훗날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鄭奎英)은 이날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일컬어 ‘최초풍운지회(最初風雲之會)’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풍운지회’란 『주역』의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운종룡 풍종호 성인작이만물도)’에서 비롯된 말인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르듯이 성인이 일어나면 온갖 사물이 그 덕을 보게 된다’는 뜻으로 명군(明君; 용)과 현신(賢臣; 호랑이)의 역사적인 만남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명군의 자질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재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이다. 그런 점에서도 정조대왕은 뛰어난 명군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관심과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특별한 관심과 각별한 애정에도 정약용은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다. 수차례 실패를 맛본 끝에 28살(17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과에 합격해 조정에 출사(出仕)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출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정조대왕은 곧바로 ‘개혁 인재 양성 코스’인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그를 발탁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을 통해 숱한 젊은 관료들을 직접 가르치고 길러냈는데, 즉위 6년이 되는 1781년부터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년 동안 초계문신을 거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이들 문신 관료들 중에서 정조대왕이 가장 총애하고 신뢰한 ‘최고의 개혁 인재이자 관료’였다.

정약용은 이렇듯 정조대왕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을 현실 속에서 하나둘 실현해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정약용은 평생 정조대왕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스승이라고 여겼다. 그는 항상 ‘임금님의 부지런히 가르치신 뜻을 저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삶’을 살았다.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과 ‘임금님의 부지런히 가르치신 뜻’은 정조대왕 사후 머나먼 유배지에 내동댕이쳐진 채 끝없는 좌절과 실의 속에서 헤매 다닌 정약용을 다시 일으키고 세워준 힘이자 에너지였다. 정약용은 평생토록 정치·경제·인문·자연·과학기술의 전 분야에 걸쳐 무려 500여권에 이르는 분량의 책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18년(1801~1818년) 유배 생활 동안 집필한 것이다.

그는 훗날 당시를 “임술년(1802년) 봄부터 즉시 저술하는 일에 몰두하여 붓과 벼루만 곁에 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다. 이 때문에 왼쪽 어깨가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될 지경에 이르렀고, 시력이 아주 나빠져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정약용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유배객의 삶을 살면서 보통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도록 이렇게 집필 및 저술 활동에 미친 듯이 매달렸던 것일까? 타고난 지식 욕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실학(實學)의 학문적 성과를 이론적으로 집대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분명 이러한 욕구·열정·사명감이 정약용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 나름의 생각으로는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가 또 다른 곳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정조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꺾여버리고 또 유배형에 처해진 후 현실의 정치무대에서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정약용 자신의 큰 꿈과 뜻, 곧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의 의지와 구상을 비록 학문의 영역에서나마 실천하고 완성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현실에서는 이미 좌절당한 큰 꿈을 미래의 개혁 세대를 위해 준비해놓는 일은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을 통해 배우고 익힌 큰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정약용의 저술은 단순한 기록과 문헌이 아니라 그가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의 가르침을 좇아 이루고자 했던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안을 집대성해 완성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미래 조선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가 정치·경제·행정·법제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조선 사회를 위한 청사진이라고 한다면, 그가 유배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완성한 『문헌비고간오』나 유배생활 동안 저술한 유학의 각종 경전과 역사서에 관한 해설 서적들은 학문 및 정보·지식 시스템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었다.

또한 『마과회통』류의 집필은 과학기술, 특히 의학 분야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고 『아언각비』나 『이담속찬』류의 저술은 문자와 일상생활 속의 언어 및 풍속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경세유표』는 1799년 발표한 『전론(田論)』과 더불어 조선의 사회경제에 관한 총체적인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17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제사상과 토지개혁론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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