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해 통곡한 가련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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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해 통곡한 가련의 사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2.0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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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⑨
▲ 유운홍의 풍속화 중 ‘기녀’.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⑨

[한정주=역사평론가] 거리상으로는 겨우 50리요, 시간상으로는 불과 60년밖에 안 된 무술년(戊戌年) 봄, 두미호(斗尾湖)에 출현한 용(龍)과 그해 겨울에 얼음이 언 일에 대한 풍문과 기억의 진위(眞僞)조차 가늠하기 어려운데 어찌 다른 나라와 옛 시대에 관해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느냐면서 만약 “『서경(書經)』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 맹자의 역설을 기가 막히게 인용한 이용휴의 ‘우기(偶記)’ 역시 꼭 소개하고 싶은 글 중 하나다.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사실이나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무술년(戊戌年) 봄, 두미호(斗尾湖)에 용이 있어 때때로 출현한다고 전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서울 사람 중에는 역시 소문을 듣고 가본 사람도 있었다. 뒤에 두미호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거짓말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은 지난 무술년 겨울에도 그러하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고도 한다.

(거리상으로) 가깝기로는 50리요, (시간상으로) 멀기로는 겨우 60년밖에 안 되는데도 (이처럼)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외국과 전 세대에 있었던 일이랴? 그러므로 ‘서경을 다 믿는다면 서경이 없는 것만도 못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용휴, 『혜환잡저 8』, ‘우연히 기록하게 된 글(偶記)’

남들이 능숙하지 못한 것에 능숙한 자가 오히려 남들이 능숙한 것에 능숙하지 못하고,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가 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하고,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지만 진정 만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역설적 표현들을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이옥의 북관의 기녀가 한밤중에 통곡한 까닭을 논한다는 뜻의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 역시 ‘역설의 미학’을 자연스럽게 구현하고 있는 글이다.

이옥이 어떤 사람에게 북관의 기녀 가련(可憐)이 한밤중에 통곡한 일을 소상하게 듣고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이렇다.

함흥의 기녀 가련은 용모가 아주 아름답고 성격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재능과 학식을 겸비하고 성격까지 툭 트인 여걸이었다. 재기(才氣)가 남달리 뛰어난 까닭에 비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마음에 꼭 맞는 상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용모가 수려하고 재주가 뛰어난 미소년을 만났는데 시작(詩作)이면 시작(詩作), 거문고면 거문고, 술이면 술, 바둑이면 바둑, 쌍륙 놀이면 쌍륙 놀이, 퉁소면 퉁소, 춤이면 춤 어느 것 하나 딱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련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사람을 만났다고 여겨 마음속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이 사람 하나를 만난 것만으로 족하다.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미소년은 주저주저하며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더니 급기야 자리에 누워서는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긴 한숨을 쉬고 짧은 탄식을 거듭 내뱉는 것이 아닌가?

미소년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가련은 불현듯 이상한 의심이 일어 창피를 무릅쓰고 먼저 다가가 더듬더듬 옷을 벗기고 보았는데,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는 ‘고자’였다. 이에 가련은 벌떡 일어나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사람이여, 이 사람이여! 하늘이여!”라고 대성통곡했다.

이옥은 이 웃기고도 슬픈 한 편의 사랑 이야기에 기발하고 우습게도(?) 논평을 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아름답고 재기가 뛰어난 기녀였지만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해 통곡한 가련(可憐)의 사연을 듣고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문장을 지녔지만 제대로 된 임금과 시대를 만나지 못해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앞서 본 역설적 표현들을 구사해 거침없이 토로한 것이다.

이옥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들어 어떻게 보면 홀로 유독 가혹한 처벌을 받았던 사람이다. 왜 정조는 김조순, 남공철 등 노론 시파계열의 고위 관료와 박지원와 이덕무·박제가 등 북학파 그룹의 문인들에는 일종의 반성문인 ‘자송문(自訟文)’을 짓게 하는데서 처벌을 끝냈으면서 일개 성균관 유생에 불과했던 이옥에게는 그토록 잔인했던 것일까?

필자 역시 아직 의문을 풀지 못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조의 문체 탄압 때문에 오히려 이옥이라는 기궤하고 독특한 한 명의 문장가를 만날 수 있으니 이옥의 불행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나?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마치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과연 500여권의 저술을 남긴 대학자 정약용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맞닿아 있다.

“논하여 말한다. 가련은 통곡을 잘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가련의 통곡이 어찌 그가 정욕을 이루지 못함을 상심해서였겠는가? 가련이 통곡한 것은 아마도 천고에 ‘만남’이 어려운 것을 두고 울었던 것이리라.

천지간에 사람으로서 ‘만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임금과 신하의 만남이요, 또 하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다. 오직 사람은 사람과 서로 합하여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는 슬픔과 기쁨이 있게 마련이니,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이미 만남을 얻어서 기뻐하는 것과 만남을 얻지 못하여 슬퍼하는 것은 의당 군신 사이와 남녀 사이가 하나같이 똑같을 것이다. … 이런 까닭에 남녀를 막론하고,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예능을 갖추어 연마하며 스스로를 아끼는 자가 자기에게 맞는 상대를 구하는 것은 구름이 용을 따르고(용이 구름을 따르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는(호랑이가 바람을 따르는) 것과 같다.

임금이 신하를 택할 뿐만 아니라 신하 또한 임금을 택하는 것이니 합당한 만남을 구하기는 마치 심산에 가서 금맥을 캐는 듯하고, 절호의 만남을 얻기는 푸른 바다에 들어가 명월주를 발견한 것과 같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 하물며 가련은 관북의 연화(烟花: 기루) 가운데 한 여자로서 크게 행하기 어려운 도를 지닌 것도 아니요, 세상을 벗어나 홀로 우뚝하다는 명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 미색과 노래와 기예가 제 생각에는 그 무리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자부하고 으스대어서 그래도 당대에 있어서는 오만하게 자처할 수 있었기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아서 그를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니 청루(靑樓: 기루)에 십 년 동안 몸을 맡기고 있으면서 하나하나 살피고 따져서 가만히 구하였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였으랴?

… 하지만 시를 잘해도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은 나의 짝이 아니다. 술을 잘 해도 노래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노래를 잘 하되 거문고를 할 줄 모르면 내 마음을 줄 사람이 아니다. 거문고를 잘 타도 바둑을 할 줄 모르면 내가 혼례의 예를 갖출 상대가 아니다. 바둑을 잘 하되 춤을 추지 못하면 내가 손꼽을 사람이 아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쌍륙과 퉁소 등 내가 할 줄 아는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뒤에야 비로소 내가 구하는 그 사람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으랴?

…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큰 물고기가 깊은 골짜기에 놓인 듯하고, 큰 새가 순풍을 만난 것 같으며, 어진 신하가 성명(聖明)한 군주의 지우(知遇)를 얻은 격이었으니 인생 백 년 동안 내내 그러하길 감히 기대할 수 없는 큰 행운이기에 하룻밤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겼도다.

‘이 밤이 어느 밤이기에 이런 해후를 하는가?’ 그대여 그대여, 이렇게 해후하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벅차며, 뜻은 교만해지고 몸은 달구어지도다! 비록 그대를 위하여 죽는다고 하여도 진정 달게 여길 바로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남들이 능하지 못한 것을 능히 하는 자가 오히려 남들이 능히 하는 것을 능히 하지 못하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가 남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을 줄을! 필경 만났으되 만나지 못한 한탄이 있게 하였으니, 아, 끝장이로다! 이 세상에선 ‘이 사람’을 참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로구나.

무릇 사람이 만나지 못함을 슬퍼함에 있어 마땅히 만나지 못할 곳에서 만나지 못하였다면 슬퍼할 게 없지만 만날 만한 곳에서 만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로 슬퍼할 일이로다.

… 그러한 즉 가련이 갑자기 일어나 목놓아 울었던 것은 실로 그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으되 또한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통곡한 것이다.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어찌 애절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말한다. 가련이 통곡한 것은 그 정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니요, 천고에 만남이 어려운 것을 통곡한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어찌 통곡을 잘 한 자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은 세 번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한 번의 눈물은 천고의 가인(佳人)을 만나지 못해 통곡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가련의 한바탕 눈물은 천고의 가인(佳人), 재자(才子)가 서로 만나지 못함을 통곡한 것이다’라고.” 이옥,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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