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얻는다”…자린고비의 경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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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얻는다”…자린고비의 경영철학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2.2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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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② 경영자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광(狂)·벽(癖)’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② 경영자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광(狂)·벽(癖)’

정민 교수가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목을 달아 10여년 전에 출간한 『미쳐야 미친다』는 인문학의 베스트셀러다. 이 책의 주제를 한자(漢字)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미치다’는 의미의 ‘광(狂)’과 ‘벽(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무엇인가에 미친 듯 몰입하는 마니아(mania)적 성향을 뜻하는 ‘벽’을 지닌 사람만이 비로소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곧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 ‘불광불급’이라는 사자성어를 재물에 확장 적용해보면 ‘불광부득(不狂不得), 미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즉 ‘미쳐야 얻는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광불급과 불광부득, 여기에는 공부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재물이든 어느 것도 적당히 해서는 결코 자신이 목적한 성과를 이룰 수 없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따라서 ‘광’과 ‘벽’에 담긴 뜻은 경영자라면 반드시 한번쯤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의 거상들은 대부분 사회적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현재 그들에 관한 자료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형편이다. 그나마 문자로 남아 있는 부자나 거상은 대부분 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의롭게 재물을 썼다는 내용 일색이다.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여긴 유학의 도덕-윤리관에서 보면 의롭게 재물을 모아 의롭게 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부정적인 본성 중의 하나인 재물욕을 교화하려 했음직하다. 간혹 재물에 미쳐 산 부자 이야기도 기록으로 남아 전해오는데, 이 역시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다스리려는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동양사상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유가(儒家)인 맹자는 재물로부터 자극받아 생겨나는 이익과 욕망이 인간의 선(善)한 본성을 흐트러뜨리므로 그것을 억압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가(法家)인 한비자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힘이 들면 쉬고 싶듯 이익과 욕망 추구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면서 그 본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공평하고 부당한 목적과 방법·수단을 통해 이익을 얻고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재물에 대한 이익과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맹자와 달리 한비자는 이익과 욕망은 긍정적으로 보고 단지 그것을 실현하는 목적과 수단 방법을 문제 삼은 셈이다.

이렇게 보면 맹자보다는 한비자의 주장이 훨씬 더 현실주의적이다. 아마도 재물에 대한 욕망을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은 물론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도 여전히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철학적 주제가 될 것이다.

여하튼 여기에서는 ‘이익과 욕망을 다스린 의로운’ 맹자적인 부자형보다는 ‘현실적인 이익과 욕망을 좇은’ 한비자적 부자형을 모델로 삼아 이야기해보겠다.

조선시대의 부자 가운데 한비자적 부자형의 대표 주자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는 17세기 초 유몽인이 기록한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충주의 큰 부자 고비(高蜚)를 꼽을 수 있다.

고비는 자신의 열정과 삶을 온전히 축재에 바친 이른바 ‘재물광(財物狂)’이자 ‘재물벽(財物癖)’, 곧 ‘재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인정보다는 재화를 소중하게 여겨 재물을 모으고 또 장사를 해 수백만 냥에 이르는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창고에 있는 궤짝 하나를 봉할 때도 직접 하고 보리싸라기나 쌀겨처럼 하찮은 것도 천금을 다루듯이 했다.

그의 재물에 대한 애정과 철저한 재산관리법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고비는 장사를 하러 먼 길을 떠날 때 언제나 자신이 돌아올 날짜를 계산해 집안 식구들이 먹을 양식을 내준 뒤 창고를 잠그고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집안 단속을 하고 막 길을 떠나려다가 밀가루 몇 말이 담긴 항아리가 창고 밖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갈 길이 바빠 다시 창고 문을 열어 밀가루를 넣지 못한 고비는 생각 끝에 밀가루에 얼굴 도장을 찍어 표시하고서는 “밀가루에 찍힌 얼굴 도장에 조금이라도 흠이 나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고비가 내준 양식을 다 먹은 집안 식구들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결국 밀가루를 절반이나 먹고, 그 중 한 사람의 얼굴 도장을 남겨 놓았다. 그 후 집에 돌아온 고비는 자신의 얼굴과 다른 표식이 밀가루 위에 찍혀 있는 사실을 알고 온 집안 식구들을 무겁게 처벌했다.

창고에 가득 곡식과 재화를 쌓아놓고도 집안 식구들에게 인색한 고비의 몰인정을 탓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일화 속에는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고비의 경영 철학이 담겨 있다.

사소한 부품 혹은 서비스 하나일망정 허투루 다루는 경영자치고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천금은 보리싸라기나 쌀겨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자라난다.”는 고비의 재물관은 충분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박제가의 문집인 『정유각집』에는 ‘백화보서(百花譜序)’라는 재미난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박제가는 꽃에 미쳐 사는 화가 김덕형의 삶을 묘사하면서 “벽(癖)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대개 벽이라는 글자는 ‘병 질(疾)’ 자와 ‘치우칠 벽(辟)’ 자를 따라 만들어졌다. 병 가운데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을 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터득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습득하는 일은 오직 벽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어야 남과 다른 독창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고비의 재물벽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고비가 말년에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자신을 찾아온 마을 사람에게 한 행동을 보면 재물에 대한 그의 남다른 마인드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고비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며칠 후 성 위 소나무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재물을 모으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마을 사람은 장막을 치고 술과 안주를 준비해놓고 고비를 맞았다. 그러자 고비는 성 위 소나무가 성벽 밖으로 멀리 뻗어 있고 또 성 밑이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마을 사람에게 소나무에 오르라고 말했다.

소나무 위에 오른 모습을 지켜본 고비는 마을 사람에게 한 손으로 소나무 가지를 잡고 몸을 성 밑 낭떠러지로 늘어뜨리면 ‘축재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마을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자 고비는 단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가 남긴 말은 이랬다. “재물을 모으고 지키는 마음을 지금 당신의 한 손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른 무언가를 떠올릴 사람은 없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다. 그 생각 또한 아주 절박한 것이다.

고비는 재물을 모으는 이치 또한 이와 똑같다고 보았다. 재물을 모으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살아야 비로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광부득, 미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곧 재물에 미치지 않고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다.

경영자는 항상 위기와 아주 가까운 환경 속에서 기업과 조직을 경영한다. 이것은 시장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기업의 경영자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다. 이때 가장 쉽게 위기에 노출될 수 있는 경영자는 ‘대충 대충’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절박한 사고와 온전하게 몰두하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자신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절대로 위기 앞에 꺾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광(狂)’과 ‘벽(癖)’이란 단어는 경영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인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명한 이라면 경영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당연히 해당되는 얘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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