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을 근대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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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을 근대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05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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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①
▲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의 초상.

[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의 18세기가 최고의 개혁군주와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해 사상과 문화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위대한 100년’이었다면 정조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19세기는 특정 세도가문이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전횡한 ‘반동과 보수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8세기와 단절한 19세기 초·중엽 70년의 시간과 공간이 이후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식민과 오욕의 역사’로 만든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그 70년의 시·공간이 18세기를 계승한 역사였다면 분명 우리의 근·현대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18세기를 뒤덮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의 뜻과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한 체제 개혁’의 꿈은 19세기로 들어서자마자 노론(老論) 당파와 세도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버렸다.

그렇다면 18세기에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했던 ‘실학과 개혁’의 자취는 정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세도권력에 쫓겨 유배지로 혹은 향촌으로 쫓겨나 야인(野人)으로 전락했을망정 실학자들은 끊임없이 개혁의 꿈을 꾸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개혁론을 갈고 다듬어 『경세유표』,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과 향촌에서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풍석 서유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개혁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가운데에서도 몇몇 뜻있는 학자들은 비록 서재에서나마 실학의 명맥과 큰 뜻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대 규모의 실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을 저술한 이규경과 『인정(人政)』과 『기측체의』를 통해 국정 개혁과 실증적·과학적 학문을 주창한 최한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19세기에 다시 체제 개혁의 원대한 뜻을 펼친 사상가를 꼽는다면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다. 그가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이면서 또한 실학을 근대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선구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규수가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이자 최초의 근대 개화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암 박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친손자다. 그는 박지원이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난 1807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박규수는 가르침은커녕 박지원의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박규수는 젊은 시절을 온전히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의 울타리 속에서 보냈다.

박규수의 아버지이자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는 직접 『과정록(過庭錄)』을 저술해 박지원의 언행(言行)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박종채는 1813년 봄부터 1816년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4년여의 시간과 공을 들여 박지원의 학문과 북학(北學)의 큰 뜻을 정리했다.

그는 박지원의 사상이 후대에까지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과정록』을 썼기 때문에 가문을 이을 장자(長者)인 박규수가 그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어렸을 때부터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익혔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박규수는 22세 때인 1828년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의 명을 받아 박지원의 글을 모두 정리해 『연암집』을 만들어 바치는 작업을 했다. 이때 그는 ‘학문이란 모두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실제나 실용과 관계없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실학사상을 깊게 체득했고 또한 자신이 나아갈 길은 오로지 ‘이용후생·부국강병·경제지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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