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부유해야 나라도 부강”…민본 중심의 부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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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부유해야 나라도 부강”…민본 중심의 부국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19 0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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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③

[조선의 경제학자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③

[한정주=역사평론가] 박규수 경제사상의 기초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민본 중심의 부국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민본(民本)은 유학의 위민(爲民)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박규수의 민본은 유학에서 말하는 사대부, 곧 사(士)라는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평등하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사농공상의 차이는 신분 혹은 계급적인 차이가 아니라 단지 직분 혹은 직업의 차이일 뿐이라고 여겼다.

“대체로 사람은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들 사(士)가 아니겠는가? 사(士)가 농토에 부지런히 힘써 땅의 재물을 기르면 농민(農民)이라고 일컫고, 사(士)가 다섯 가지 재료로 꾸미며 다듬고 백성들의 기물을 변별해 이용후생의 물건을 개발하면 공장(工匠)이라고 이르고, 사(士)가 물건의 있고 없음을 헤아려 교역해 사방의 진귀한 물건을 통하게 해 먹고 산다면 상인(商人)이라고 일컫는다. 그 몸은 사(士)이지만, 그 직업은 농민(農民)·공장(工匠)·상인(商人)이다.” 박규수, 『환재집』 ‘잡문(雜文)’ 중에서

근대 경제학의 ABC는 이렇듯 신분 차별을 뛰어넘은 평등 의식이 경제와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박규수는 신분 차별이나 억압 특히 양반사대부의 농공상(農工商)에 대한 착취와 수탈 없이 사민(四民)이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때 진실로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염정(鹽政)을 다룰 때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옹호한 것이나 진주 민란의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어 가서 삼정(三政)의 문란을 바로잡아 농민의 생계수단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예전에는 민간의 개인 상인이 염전을 일구는 백성에게 미리 소금 값을 지불하거나 혹은 대부해주었다. 이것은 염전을 일구는 백성들의 급박한 사정을 헤아린 것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왜인가? 개인 상인들이 관청의 염전(鹽田)에서 소금을 사면 관리들이 권세를 부려 상인들을 억류하고 물품을 몰수해 관청의 소속으로 만든 다음에 뇌물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풀어준다. 이 때문에 개인 상인들의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설치한 염전이 많이 있는데 소금을 사고파는 권한은 어째서 공전(公田)에서만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상업 활동이 막혀 끊어지고 재물과 화폐가 제대로 유통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공염(公鹽)과 사염(私鹽)을 똑같이 교역하게 한다면 관청과 백성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고르게 된다.

그러나 관리들이 권세와 이익의 계책을 부려 공염이 팔리기 전에는 어떠한 상인도 거래할 수 없게 하면 소금을 먹기 위해 사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소금 물량은 적기 때문에 소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관청에서는 원래 가격보다 오른 가격에 소금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또한 소금 가격이 떨어지면 소금 상인에게 원래 가격대로 사게끔 압력을 가한다. 이러면 연안의 백성이 피해를 보게 된다.

소금 가격이 오른 까닭은 공염 탓인데 중개인의 물품 거래마저 가로 막으면 소금 가격이 올라서 산골 마을 백성들은 더욱 소금 구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상인들 역시 가격이 높을 때 소금 거래를 하지 못하고 헐값일 때 거래하기 때문에 마침내 본전마저 잃고 마는 피해를 입는다.

이 모든 해로움이 공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단이다. 따라서 공염을 혁파하여 백성의 고통을 없애해야 한다.” 박규수, 『환재집』 ‘경상우도암행어사별단’ 중에서

“난민(亂民)들이 스스로 죄에 빠져든 까닭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삼정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은 환곡(還穀)이 가장 큽니다.

진주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고 단성현은 가구 수가 수천에 불과한데 환곡은 9만9000여 석이나 되고 적량진은 가구 수가 1백에 불과하지만 환곡은 10만8900여석입니다. 이 때문에 환곡을 보충할 방법은 모두 올바른 다스림을 어기고 사리를 해치는 것일 뿐입니다. 오로지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은 상황에 미쳐서는 특별히 하나의 관청(삼정이정청)을 설치해야 합니다.

… 한 도(道)에 먼저 시험해 보고 차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폐단이 사라지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박규수, 『환재집』 ‘환곡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관청 설치를 청하는 상소’ 중에서

특히 1861년 청나라 사행(使行)에서 박규수는 청나라의 급격한 쇠퇴는 다름 아닌 ‘내치의 문란이 농민 반란(兵亂: 태평천국의 난)을 초래했고, 이것이 서구 열강에 틈을 주어 침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통해 백성의 삶과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백성의 삶이 안정되고 부유해지면 나라 역시 부강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서구 열강의 침략에도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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