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천한 백성들의 삶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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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천한 백성들의 삶과 이야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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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⑥
▲ 혜원 신윤복의 1844년경작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 중에서.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18〜19세기에 들어와 야담이 대유행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대부 계층뿐만 아니라 여항(閭巷) 출신의 평민이나 기인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전기집(傳記集)이라고 할 수 있는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등이 등장했다.

특히 이들은 모두 중인 출신의 문인이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양반 사대부 출신 문인의 붓 끝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자신이 속한 계층의 사람이나 혹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 취급을 당해왔던 천한 백성들의 삶과 이야기를 전기의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해학과 풍자 정신은 이들 책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미학이자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평민의 전기는 조희룡의 『호산외기』에 등장하는 협객 장오복에 관한 이야기인 ‘장오복전(張五福傳)’이다.

청계천 광통교에서 권세가인 포도대장의 애첩의 심기를 건드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용서를 구걸하기는커녕 오히려 포도대장의 장부답지 못한 처사를 조롱해 풀려난 이야기나 기생을 사모해 단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갖바치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목이 그지없이 재미있다.

앞의 에피소드가 애첩조차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인양 다루는 권세가의 횡포를 조롱한 풍자에 가깝다면 뒤의 에피소드는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기생조차 가까이 할 수 없는 가장 천한 갖바치의 서러운 운명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오복은 영조 때 사람으로 협객으로 소문이 났다. 이부(吏部)의 아전이 되었을 때 이부의 한 낭관(郎官)이 젊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장오복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낭관이 성을 내며 그를 파면시키려고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싸움을 하고 있을 때에는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무릇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거나 그른 것을 억지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강한 자를 억누르고 사리를 따져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과하고 수긍하게 만든 뒤에야 그만두었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였다. 간혹 분쟁이 생겨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문득 겁주기를 ‘장오복이 온다’고 말하였다.

그가 술에 취해 광통교(廣通橋)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가마 하나가 지나가는데 따르는 종들의 모양새가 심히 호사스러웠다. 가마꾼들은 장오복이 술에 취해 가마를 부딪치고 가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그를 내리쳤다.

장오복은 성을 내며 말했다. ‘어느 천한 종놈이 감히 이 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이것은 바로 가마 속의 사람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 가마의 밑을 찔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요강에 맞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온 저자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이 가마에는 원수(元帥) 장지항이 총애하는 첩이 타고 있었다. 원수는 이때 포도대장의 자리에 있었는데 군졸들을 풀어 장오복을 잡아다가 죽이려 하였다.

장오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크게 웃기만 하였다. 원수가 성을 내며 그러는 이유를 물었더니 장오복이 말하였다. ‘장군께서 윗자리에 계셔서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소인이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점점 사라진 것입니다. 이 한 세상에 대장부라고는 오직 장군과 소인뿐이온데 일개 천한 계집 때문에 장부를 죽이고자 하시니 제가 한번 죽는 것은 두려울 게 없지만 장군의 장부답지 않는 것에 대해 혼자서 웃는 것입니다.’ 원수는 웃으면서 그를 풀어 주었다.

이웃에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가 살았는데 매달 신 한 켤레를 장오복에게 바쳤다. 장오복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갖바치가 말하였다.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말해 보아라.’ ‘아무개 기생을 연모하고 있지만 제 힘으로는 되지를 않습니다. 원컨대 저를 위하여 일을 도모해 주십시오.’ ‘어려운 일이다만 생각을 해 보겠네.’

어느 날 갖바치를 불러 계책 하나를 전해 주면서 말하였다.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

다음날 장오복은 갖바치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기녀의 집에 가서 앉아 있는데 젊은이들이 마루에 가득하였다. 갖바치는 부랑배 행세를 하며 웃옷을 풀어 헤치고 팔을 걷어 부치면서 들어와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장오복이 여기 있는가?’ 장오복은 그 소리를 듣고 바라지문으로 달아나 버렸다.

여러 젊은이들이 말하였다. ‘장오복을 만나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갖바치가 말하였다. ‘저 사나운 놈은 마을의 걱정거리다. 내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를 없애려 한다.’

여러 젊은이들이 서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장오복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하물며 우리들이 맞설 수 있겠는가?’ 젊은이들이 모두 흩어지자 갖바치가 기녀에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하룻밤 머물며 장오복을 기다리겠다.’ 기녀는 그에 대한 대접을 더할 수 없이 하였다.

하룻밤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장오복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니 장오복이 말하였다. ‘돌아가 네 일을 해라.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삼가고 말하지 말라.’” 조희룡, 『호산외기』, ‘장오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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