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⑤ 퇴계의 정신 깃든 성산(聖山)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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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⑤ 퇴계의 정신 깃든 성산(聖山) ‘청량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6.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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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⑪
▲ 경북 봉화군에 위치한 청량산.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지리산을 사랑했던 조식이 스스로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는 호를 썼던 것처럼 이황은 청량산(淸凉山)을 무척 좋아해 자신을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도산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청량산은 우뚝 솟은 열두 봉우리의 기암괴석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예로부터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은 높이가 870미터에 불과하고 둘레도 채 100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라 안의 여러 산과 비교해보면 하나의 흙무더기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남겼다. 수려한 산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웅장하거나 기이하지는 않아 명산(名山)이라고 할 만 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16세기 이래 청량산은 선비들이 숭상하는 성산(聖山), 즉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았다. 그 까닭은 이 산 구석구석에 이황의 얼과 혼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청량산을 유람한 어떤 선비는 “이 산의 봉우리와 바위와 물길과 돌 하나하나가 모두 퇴계선생이 유람하며 보고 좋아하여 즐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까지 했다.

청량산은 이황에게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의미가 있는 산이었다. 이황이 청량산에 직접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의 나이 15세 전후로 추정되는데, 이때의 일을 그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형(父兄)을 따라 책보자기를 짊어지고 이 산을 오고가며 글을 읽은 것이 몇 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한양으로 갔다가 병을 이유로 거듭 사직하고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가기를 거듭하는 우여곡절을 겪느라 꿈속에서는 볼망정 정작 청량산을 찾지는 못했다. 당시의 심정을 이황은 이렇게 노래했다.

“꿈에서는 이따금 다시 맑은 산을 넘지만 / 형체는 지금도 오히려 먼지구덩이에 떨어져 있네.”

‘맑은 산’, 곧 청량산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육신은 여전히 ‘먼지구덩이’, 즉 벼슬살이에 옭매어 있는 자신을 빗대어 읊은 시구(詩句)다.

다만 풍기군수로 있던 1549년 봄 주세붕이 지은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을 고을 사람에게서 얻어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면서 청량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뿐이었다.

풍기군수에서 물러나 다음해에 퇴계(退溪)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지만 한 번도 청량산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임자년(壬子年)인 1552년 4월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갔다가 ‘청량산 유람록’을 지은 주세붕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세붕의 특별한 요청에 따라 ‘청량산 유람록’에 발문(跋文)까지 써 주게 되었다.

▲ 청량산에 세워진 퇴계의 ‘청량산가’ 시비
이 글에서 이황은 ‘청량산’을 가리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오가산(吾家山)’, 곧 ‘우리 집안의 산’이라고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안동부(安東府)의 청량산(淸凉山)은 예안현(禮安縣) 동북쪽 수십 리 지점에 있는데, 조상 대대로 살아온 황(滉)의 집이 그 노정(路程)의 절반쯤에 있다. 새벽에 출발해서 청량산에 오르면 해는 정오가 채 되지 않고 허기가 지기는커녕 오히려 아직도 배가 불러 있다. 비록 산은 다른 지방에 있지만 진실로 우리 집안의 산이다.”『퇴계전서』, ‘주세붕의 청량산 유람록에 쓴 발문(周景遊淸凉山錄跋)’

당장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고 싶었지만 임금의 간곡한 청 때문에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한 이황은 몸은 비록 한양에 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1553년 나이 53세 무렵부터 스스로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1555년 2월 반드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서를 내어 마침내 해직되었다.

벼슬의 족쇄에서 벗어나 퇴계 가의 집으로 돌아온 이황은 그해 겨울 오랜 세월 동안 꿈속에서나 만났던 청량산을 작정하고 들어갔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당시 이황은 ‘11월 청량산에 들어가다’라는 시를 지어 늦게나마 다시 청량산을 찾은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있으니 / 질병 다스리려고 하나 자못 어렵구나 / 신선이 사는 산이 멀지 않아 / 목 빼어 바라보며 마음에 잊혀지지 않더니 / 외로운 산의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고 / 새벽에 길 떠나 두 고개를 넘었네 / 겹쳐 쌓인 얼음을 굽어서 보고 / 첩첩이 가린 산을 우러러 보네 / 징검다리 밟고 빠르게 내달리는 개울을 건널 때에 / 각별히 조심하여 깨우친 것 많았네 / 깊은 산림 태고 적 눈이 쌓여 / 밝고 환한 햇빛조차 그림자 없네 / 경사진 지름길은 낭떠러지 미끄럽고 / 그 아래로는 구덩이나 함정과 다름없네 / 가고 가다 기력은 이미 다했지만 / 오르고 올라 마음은 더욱 맹렬 하네 / 산에 사는 중이 웃고 또한 위로하니 / 서쪽 요사(寮舍) 고요히 나를 맞이하네 / 팔구일 심신이 편안하여 / 지게문 닫고 숨어 머리조차 내밀지 않아 / 눈보라 몰아쳐도 보지를 못했는데 / 하물며 바람 소리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오늘 아침 햇빛 어여쁘고 사랑스러워 / 지팡이 짚고 나서니 바위길이 멀구나 / 저기 하늘에 꽂힌 고개에 올라 / 두 눈으로 우주(宇宙)를 달렸네 / 근력이 쇠약하여 험준한 봉우리가 두려워 / 이 몸이 소원한 일 급하게 이루지 못하지만 / 아무거나 잡고 올라 오히려 조금 더 시험해보고 / 눈을 들어 돌아보니 구름이 천 경(頃)이네 / 기묘한 뜻은 말로 다 하기 어렵고 / 아름다운 풍경 매양 홀로 차지하네 / 사계절은 이미 끝을 다하려고 하나 / 그윽한 시골에 두는 몸 한탄하지 않네 / 다만 평생 사귄 벗 생각에 / 내 마음 태워 근심스럽네 / 소중한 언약 아직 실천하지 못했으니 / 먼 곳에 있는 이를 청하기도 어렵네 / 어찌하면 이곳에 함께 와서 / 힘을 다해 절경(絶境)에 이를까.” 『퇴계전서』, ‘11월 청량산에 들어가다(十一月入淸凉山)’

한 달여 동안 청량산에서 머물다가 퇴계 가의 집으로 돌아온 이후 이황은 서당을 지을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57세 때 도산(陶山) 남쪽에서 마땅한 장소를 구했고, 앞서 말한 대로 5년여의 공사를 거쳐 1561년 도산서당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때 청량산에 대한 이황의 각별한 애정을 잘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왜 청량산이 아닌 도산에 서당을 세우는지에 대해 의아해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황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옛 적에 산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반드시 명산(名山)을 얻어 스스로 의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청량산에 거처하지 않고 이곳에 거처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전서』, ‘도산기’

이황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청량산이 아닌 도산을 선택한 까닭을 밝히고 있는데, 그 첫째 이유는 청량산의 높은 절벽과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늙고 병든 자신에게 편안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청량산에는 물이 없어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청량산은 절벽이 만 길이나 서 있고, 위태롭게 깎아지른 골짜기를 마주하고 있어 늙고 병든 나 같은 사람에게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산을 좋아하는 것과 물을 좋아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질 수 없습니다. 지금 낙천(洛川 : 낙동강)이 비록 청량산을 지나가기는 하지만 산 중에는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진실로 청량산에 거처하기를 원하지만 그 일은 차후로 미루고 먼저 이곳에 터를 잡은 까닭은 무릇 산과 물을 겸하여 늙고 병든 몸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퇴계전서』, ‘도산기’

그러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오히려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일수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조(觀照)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의 진정한 가치를 배가(倍加)시키는지도 모른다.

이황에게 청량산이란 그런 존재였다. 청량산을 마음속의 고향 혹은 마지막 마음의 안식처로 남겨둔 채 매일 그 산을 바라보면서 지내는 삶을 원했기 때문에 이황은 청량산이 아닌 도산에 거처를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황의 심정은 ‘산을 바라보며(望山)’라는 제목이 붙은 다음과 같은 시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겠는가 / 하지만 청량산이 더욱 맑고 절묘하다네 /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 맑은 기운이 사람의 뼛속까지 들어오네.” 『퇴계전서』, ‘산을 바라보며(望山)’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 이 산을 통해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릴까봐 염려하는 이황의 재치 넘치는 시구(詩句)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청량산을 아꼈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청량산 열 두 봉우리(六六峯)를 아는 이 나와 흰 갈매기뿐 / 흰 갈매기야 말하겠느냐 못 믿을 것은 복숭아꽃이로다 / 복숭아꽃아 물 따라 가지 마라 배타고 고기 잡는 이 알까 두렵구나.” 『퇴계전서』, ‘청량산가(淸凉山歌)’

‘명승지(名勝地)와 명산(名山)은 사람에 의해 이름이 난다’는 말이 있다. 만약 이황이 없었다면 청량산은 산세가 수려한 수많은 산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황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산은 도산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朱子)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일컬어지는 ‘퇴계의 정신이 깃든 성산(聖山)’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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