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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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7.0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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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 동방 사현(四賢).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성종(成宗) 시대에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士林)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정미사화의 참화(慘禍)와 재앙을 겪으면서도 명종(明宗) 말기 훈구파와 외척 세력의 마지막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권간(權奸) 윤원형 일파를 단죄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은 선조(宣祖) 시대에 들어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명실상부한 권력 집단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림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중앙 정치 무대를 장악한 사림은 성리학(性理學)을 국가 통치의 이념과 원리로 삼았다. 또한 사림 권력의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적통(嫡統)과 도통(道通)의 계보를 세우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사업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때 특히 사림 세력은 과거 다섯 차례의 사화(士禍)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절의(節義)를 지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혹은 유배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던 사림의 지사(志士)들을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추존(追尊)하는 일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사림의 철학적 기반이기도 했던 ‘선비정신’이 무엇인가를 만천하에 보여준 지사들을 유학의 성지인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것이야말로 사림 권력에 정치적 명분은 물론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림의 철학인 ‘선비정신’은 ‘인(仁)’과 ‘의(義)’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어진(仁) 마음으로 백성을 대하고 의로운(義) 뜻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만약 인의(仁義)에 어긋난다면 선비는 절대로 이로움을 추구하지 않고, 또한 권력이 인의(仁義)를 거스른다면 선비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따르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이으면서도 지사의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사람만이 유학의 성지(聖地)인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방 사현(四賢)’이다.

선조 1년인 1568년 사림의 적극적 지원 아래 성균관의 유생들이 앞장 서 임금에게 문묘 종사를 요청한 인물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등 네 사람이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성균관 유생들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한 상소의 내용”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실려 있는 상소문의 내용은 이랬다.

“무진년(戊辰年:1568년) 여름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그 상소문에서 김굉필에 대해 논하기를 ‘학문이 끊어진 후에 태어나서 일찍이 큰 뜻을 품고 분발하여 배우면 반드시 성현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소학(小學)』을 익혀서 근본을 배양하고 『대학(大學)』을 따라 규모를 세웠으며 성(誠)과 경(敬)을 힘써 지키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조예가 이미 깊어지고 실천함이 더욱 돈독해지자 사문(斯文:성리학)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밝히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순서 있게 가르치니 무릇 세상에 이름 높은 현명하고 어진 선비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 풍격(風格)과 명성(名聲)이 미치는 곳이면 누구나 선(善)을 향하여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한 시대가 도학의 종주(宗主)라고 일컬었습니다’고 하였다.

상소가 세 번째 올라오자 당시 병조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상소를 대신에게 내렸다. 이준경(李浚慶) 등이 의논하기를 ‘도학의 공(功)으로 말하자면 조광조를 종사(從祀)하려고 할 경우 김굉필도 나란히 종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라로부터 고려까지 문장에 능한 선비는 빈번하게 배출되었지만 의리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로부터 계도(啓導)되었습니다.

김굉필은 우리나라에서 학통(學統)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가장 먼저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여 구습(舊習)을 모두 버리고 『소학』에 온 마음을 바쳤습니다. 명예와 이욕을 구하지 않고 움직일 때나 고요하게 거처할 때나 반드시 예법에 따르며 경(敬)에 이르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진실로 오래도록 도(道)를 이루고 덕(德)을 세우는데 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재앙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자 조용하게 죽음에 나아갔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그 품은 뜻을 펴보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는 얻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후생(後生)을 가르치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아 우리 동방의 선비들로 하여금 성현(聖賢)의 학문이 존재함을 알게 한 것은 참으로 이 분의 공입니다’ 고 하였다.” 『선조실록』, 5년(1572) 9월19일

그런데 선조(宣祖)는 이들 네 사람이 선대(先代)의 임금 때 화환(禍患)을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문묘 종사를 결정하지 못했다. 옥당(玉堂:홍문관)에서 특별히 이들의 사적과 언행을 적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임금에게 올렸지만 선조는 선대 임금과 이들 사현(四賢) 사이의 일에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말들이 많아서 문묘 종사는 불가하다는 뜻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옥당에 배속되어 있던 사림 출신의 관리들이 들고 일어나 선조의 의심과 우유부단함을 강하게 질타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혼란한 연산조(燕山朝)에서 죄를 입었습니다. 당시 죄를 입은 이들이 모두 어진 선비였지만 두 사람은 특히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조광조는 독실하게 배우고 몸소 실천하여 도(道)에 밝고 덕(德)이 우뚝 서 있어 중종(中宗)이 바야흐로 높은 벼슬을 주고 당우(唐虞:요순시대)의 정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게 모함을 당하여 마침내 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어린아이는 물론 심부름하는 하인들까지 모두 조광조가 애매한 죄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오히려 그의 어진 품성과 행동에 대해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언적은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경(敬)’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였으며 옛사람을 본받아 행동했으므로 그 학문의 조예가 심오하였습니다. 조광조 이후에는 이언적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을사년에 선비들이 죄를 당했을 때 처음에는 죄를 입지 않았지만 권간(權奸)이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것을 질시하고 모함하여 유배까지 보냈습니다. 끝내 죄를 모면하지 못했으나 선비들이 그의 고풍(高風)에 감복하여 지금까지도 우러러 받들고 있습니다.

이 네 신하의 마음과 행적은 털끝만치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여러 신하들이 경연(慶筵)에 출입할 때마다 매번 성상(聖上)을 위해 반복하여 진달(陳達)했던 것입니다.

만약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포상을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여 억울한 죄는 씻어주시고, 또한 저서(著書)와 사실(事實)과 행장(行狀)을 수집하도록 명을 내려 인출(印出)한 다음 배포하여 나누어주어 사람들이 성상께서 어진 선비를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뜻을 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선(善)이 잇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에 성대한 일입니다.

어찌 한때 모함을 모면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 사이에 의심을 둘 수 있겠습니까. 비록 심기에 불편한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소인배들의 흉악한 태도와 정상을 드러내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절대로 선대의 임금께 누(累)가 되지 않습니다.

인심(人心)은 지극히 공평하여 옳고 그른 것을 속이기 어렵습니다. 민가(民家)의 유생(儒生)들이 이 분들의 저술을 얻는다면 한 마디 말과 하나의 글자도 모두 즐겨 외우고 경복(敬服)할 것입니다.

비록 인출(印出)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인출하여 배포해 나누어 주신다면 선(善)을 향해 일어날 선비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속히 결단을 내려 주시고 의심하시 마소서.” 『선조실록』, 3년(1570) 5월16일

이들 상소문을 통해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등 네 명의 지사(志士)를 칭송하기 위해 사용한 ‘사현(四賢)’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다.

그 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퇴계 이황이 사망하자 선조 9년(1576년)에 다시 이황의 문묘 종사를 추가 요청하면서 이른바 ‘동방 오현(五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현’의 문묘 종사는 사림의 분열과 갈등에다가 임진왜란 등 연이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큰 힘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의 상흔이 조금씩 가라앉고 나라가 안정되어 가자 다시금 이들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문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1610년 이들 오현은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配享)되기에 이른다. 1568년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된 ‘동방 사현’의 문묘 종사 운동이 40여년이 지난 후 ‘동방 오현’의 문묘 종사로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광해군은 교서를 내려 이들 오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이유가 “백세토록 사표(師表)로 삼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광해군의 말처럼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들 ‘동방 오현’은 사림의 표상이자 선비정신의 사표로 내외의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앞서 이황의 호에 대해서는 살펴보았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사현(四賢)의 호에 담긴 뜻을 알아보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조명해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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