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一蠹) 정여창① “나는 한 마리 좀 벌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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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一蠹) 정여창① “나는 한 마리 좀 벌레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7.0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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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②
▲ 일두 정여창의 초상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사림(士林)’이라는 용어는 성종 시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인 정여창·김굉필·김일손·홍유손 등이 신진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성종은 이전 세조(世祖) 때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공신(功臣)과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영남의 재지사림(在地士林)을 대거 발탁했다.

당시 사림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종직이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종주(宗主)라고 일컬어지는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길재의 수제자였던 김숙자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김종직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사림의 적장자였다.

성리학을 신봉하고 정몽주와 길재를 종주로 섬겼던 사림은 무엇보다 절의(節義)와 기개(氣槪)를 제일의 가치로 여겼다. 특히 김종직은 세조가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사건을 인의(仁義)를 어지럽힌 행위로 본 반면 성삼문 등 사육신은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킨 지사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세조의 친손자였던 성종에게 서슴없이 ‘사육신은 충신이다’는 직언을 했고 만약 그러한 변고가 다시 일어난다면 자신은 반드시 ‘성삼문이나 박팽년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이처럼 절의(節義)를 숭상한 김종직의 철학은 그가 함양군수 시절 학문을 가르쳤던 정여창·김굉필 등의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여창이 김종직을 처음 만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성종 3년(1472년) 나이 23세 때였다. 그는 4세 연하이지만 ‘지동도합(志同道合:뜻을 함께 하고 도(道)를 합한다)’의 지기(知己)를 맺은 김굉필과 함께 1년 전에 자신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 ‘연보(年譜)’에는 당시 김종직이 자신을 찾아온 남달리 총명한 두 젊은 제자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다.

“(임진년(1472년). 성종 3년. 나이 42세) 정여창과 김굉필은 서로 친구인데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옛 사람들이 공부한 순서에 따라 가르쳤다. 먼저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이르도록 하였다. 정여창과 김굉필은 날마다 가르침을 받들어 그 강령과 요지를 탐구하고 도의(道義)를 연구하고 궁리했다.”

이후 김종직이 한양으로 올라가자 정여창은 지리산에 들어가 3년 가까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유학의 경전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27세 무렵 한양으로 올라가 옥당(玉堂:홍문관)의 응교(應敎)로 관직에 있던 김종직을 다시 찾아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의 성리학을 배웠다.

▲ 중국 송(宋)나라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 정여창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 벌레(天地間一蠹)’라는 정이천의 말에서 ‘일두(一蠹)’를 취해 호로 삼았다.
정여창이 중국 송(宋)나라에서 발원한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의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 벌레(天地間一蠹)’에서 ‘일두(一蠹)’라는 말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은 시기 역시 김종직과 사제의 인연을 맺은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이천은 다른 사람의 은택(恩澤)을 입고 살면서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恩澤)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한 마리의 좀 벌레(一蠹)’에 불과하다고 했다.

“농부(農夫)는 무더위와 한겨울에 열심히 경작하여 내가 이 곡식을 먹고 공인(貢人)이 어렵게 기물(器物)을 만들어 내가 이를 사용하고, 군인(軍人)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고 지켜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恩澤)을 주지 못하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낸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 벌레’ 같은 존재다. (김건우 지음, 『옛사람 59인의 공부산책』 P37에서 재인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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