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삶의 가치와 미덕을 정면에서 거부한 불온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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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삶의 가치와 미덕을 정면에서 거부한 불온한 글쓰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9.20 0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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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③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③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들 지식인과 문인 역시 18세기에 와서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미 시대를 앞서 그러한 경향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글을 쓴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 주자가 허균과 이수광이다.

먼저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읽어보자. 성현의 삶을 추구하는 도학자(성리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이다. 그중 특히 음식에 대한 탐욕은 여색을 탐하는 색욕(色慾) 만큼이나 최악의 경계 대상이었다.

그런데 허균은 음식을 탐하는 자신의 욕망, 다시 말해 음식에 대한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도문대작’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반성과 근신해야 할 유배지에서!

성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도문대작’은 인간의 욕망을 천연의 본성으로 긍정하는 천박한 글이자 성리학적 삶의 가치와 미덕을 정면에서 거부하는 불온한 글쓰기이다.

글의 제목만 보아도 도덕군자인양 위선을 떨던 도학자들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풀이하면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도문대작’은 개성적 자아와 개인의 취향 및 기호를 자유롭게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 시대의 지성사적·문학사적 경향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집이 비록 한미하고 가난하지만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각 지방의 특별한 음식을 예물로 보내주는 자들이 많아서 어릴 적에는 진귀한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었다. 장성해서는 부잣집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또 갖가지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북쪽지방으로 피난하였다가 강릉의 외가로 갔기에 낯선 지방의 기이한 음식을 두루 맛볼 기회를 얻었다. 베옷을 벗고 벼슬하기 시작한 뒤로는 남과 북의 임지(任地)로 떠돌아다니면서 더더욱 남들이 해주는 음식을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음식이라면 조금씩 맛보지 않은 것이 없고 좋다는 음식이라면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요, 그 가운데 식욕은 특히 목숨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선현들께서 식욕을 천하다고 하신 말씀은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여 이익에 몸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켜 말했을 뿐이다.

성인께서 한 번이라도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 언급을 회피한 일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여덟 가지 빼어난 음식이 무슨 이유로 예(禮)를 적은 경서에 기록되었고 맹자(孟子)가 물고기와 곰발바닥 요리를 구분하여 말했으랴?

나는 예전에 하증(何曾)이 쓴 『식경(食經)』과 서공(舒公)이 쓴 『식단(食單)』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천하의 온갖 음식을 다 거두어서 풍성하고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한 음식의 종류가 대단히 많아서 일만의 단위로 헤아려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그저 번갈아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서 눈과 귀를 현란하게 만든 자료에 불과하다.

조선이 비록 외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드높은 산지로 중국과 막혀 있다. 따라서 생산되는 물산이 풍부하고 넉넉하다. 만약 하씨(何氏)와 위씨(韋氏) 두 분의 사례를 적용해 명칭을 바꾸어 구별하기로 한다면 얼추 일만의 단위로 음식의 가짓수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거처를 옮기고부터는 쌀겨나 싸라기조차 제대로 댈 형편이 못 되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라곤 썩은 뱀장어와 비린내 풍기는 물고기, 쇠비름과 미나리에 불과하였다. 그조차도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하여 밤새 뱃속이 비어 있었다.

산해진미를 입에 물리도록 먹어서 물리치고 손도 대지 않던 옛날의 먹거리를 떠올리고 언제나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곤 하였다.

이제는 아무리 다시 먹고 싶어도 하늘에 사는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인 양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동방삭(東方朔)이 아니고 보니 무슨 수로 그 복숭아를 몰래 따겠는가?

마침내 그 음식들을 분류하여 기록하고 틈이 날 때마다 살펴봄으로써 고기 한 점 먹은 셈 치기로 하였다. 작업을 마치고 나서 책의 이름을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입맛을 다신다’는 뜻으로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 하였다.

세상의 벼슬 높은 자들은 온갖 음식 사치를 다 누리면서 하늘이 낸 물건을 절제함 없이 마구 쓴다. 나는 내 경우처럼 영화와 부귀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경계하고자 한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4월21일, 성성거사(惺惺居士)가 쓴다.” 허균, 『성소부부고』, ‘도문대작인(屠門大嚼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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