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 영국에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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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 영국에 길을 묻다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7.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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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코끼리 쉽게 옮기기』, 연금개혁의 전시장·실험실에서 해법 모색
 

성장지상주의에 갇혀있던 한국경제에 분배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복지문제는 끊이지 않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특히 노인연금 20만원으로 대표되는 기초연금제도를 둘러싼 공적연금 논란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와 노인 빈곤 문제 등 앞으로도 개혁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연금 문제는 워낙 전문적이고 복잡해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연금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회계약이며 여러 사회 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연금은 복지국가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연루돼 있는, 성숙한 복지국가의 최대 지출 프로그램이다.

특히 기여와 급여가 긴밀히 연결돼 있는 연금제도를 택한 나라들의 경우 연금은 일종의 ‘정치적으로 구축된 소유권’이 된다. 사람들은 연금 급여는 평생에 걸친 기여의 대가이며 따라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연금의 재조정은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격렬한 갈등을 수반하게 된다. 이는 세대와 계층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수립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사회계약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데 있다.

신간 『코끼리 쉽게 옮기기』(후마니타스)는 연금 개혁의 전시장이자 실험실인 영국 사례를 통해 연금 문제를 큰 틀에서 접근하고 있다. 즉 서로 성격이 다른 영국의 세 차례 연금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과 한국 연금제도의 방향을 제시한다.

1986년 대처 정부의 연금 개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영국 연금 개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개혁이다.

대처 정부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공적연금의 잔여화와 노후 소득 보장의 시장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1986년 개혁은 바로 그 물꼬를 튼 개혁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공적연금이 삭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진 후속 개혁과 그 누적적 효과들은 마침내 대처 정부의 최초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 공적·사적 연금 간의 균형이 뒤바뀐 것이다.

1986년 개혁은 또한 연금 정치 자체를 재구조화한 개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적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을 약화시킨 반면 민간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들을 창출하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변화는 향후 연금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수당의 연금 개혁에 대해 노동당은 자신이 집권하면 보수당의 개혁을 되돌려 과거의 연금제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97년 드디어 권력을 장악한 신노동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동당의 개혁은 보수당의 연금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문제점들을 손질하는 선에 그쳤다.

민간연금의 비중이 높아진 기존의 연금 체계를 받아들이되 그 폐해를 시정하는 것, 즉 저소득층의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에 맞는 새로운 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요컨대 1990년대 말 노동당 정부의 연금 개혁은 ‘제3의 길’ 논리에 충실하게,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연금 개혁을 지배해 온 민영화·자유화·개인화의 논리를 계승하되 국가 규제와 저소득층에 대한 재분배를 약간 강화하는 데 그친 것이다.

노동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간층과 경영계의 지지를 얻어야 했고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노선과 정책을 상당 정도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당은 선거에서 과거 보수당에 표를 던졌던 상층 노동자들과 중간층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반면 노조와의 특수 관계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됐다.

이런 노동당의 권력 자원의 변화, 그리고 ‘증세 불가’를 출발점으로 하는 우경화된 복지 정책의 전반적 틀이야말로 신노동당의 1차 연금 개혁의 성격을 규정한 권력 자원적 요소였다.

즉 노동당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정책들의 범위는 협소해져 있었다. 결국 권력 자원을 얻기 위한 과정 자체가 그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줄였고 향후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운신의 폭 내에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반면 신노동당 2차 개혁은 권력 재창출을 통해 좀 더 여유가 있어진 신노동당의 입지를 반영한다.

노동당 정부에 의해 2002년 시작돼 2011년 마무리된 일련의 연금 개혁은 1980년대 이후 연금 개혁의 일관된 기조였던 민영화·자유화·개인화에서 벗어나 제한적이나마 연금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강화와 노동시장 약자에 대한 배려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개혁은 초당적 합의에 입각해 노동당 정부에 의해 시작됐지만 보수·자유 연립정부에 의해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경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기초연금 지급 방식 논란에도 일정한 시사를 준다. 기초연금의 인색한 설계는 당장 연금 지출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풍선효과처럼 다른 부작용을 부르고, 이는 다시 공공 지출을 늘리는 역할을 하기 쉽다.

영국에서는 기초연금 급여를 물가에 연동해 기초연금액이 낮아졌지만, 이는 결국 공공부조 혹은 연금크레디트라는 형태의 공공부조성 급여를 늘렸다.

또한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기 위한 자산조사는 저소득층의 저축 유인을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행정적 비용을 유발했고 제도를 하염없이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면서도 빈곤 감소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2013년 보수·자유 연립정부는 연금 수급 연령을 더 올리는 대신 기초연금과 제2국가연금과 통합해 2016년부터 30년 이상 가입자에게 주 140파운드의 균등 연금을 지급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영국의 국가연금은 베버리지 이후 약 3세대 동안 온갖 복잡한 제도를 실험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애초의 출발점, 즉 빈곤 방지에 초점을 둔 균등률 기초연금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영국의 긴 실험은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는 수고보다 차라리 적정 수준의 보편 급여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에도 부족한 기초연금액은 결국 노년의 공공부조 수급 자 수를 늘리게 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에 연동한 기초연금 지급은 비록 일부일지라도 국민연금 가입자의 이탈을 불러 전체 노후보장 체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영국의 경험은 노년의 기초 보장이 결국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풍선효과를 낳는 복잡한 제도 설계가 아니라 증세를 통한 비용 조달이 답일 것이다. 이 역시 오랜 실험 끝에 영국민이 도달한 결론이다.

2000년대의 합의적 연금 개혁 방식도 한국 사회가 특히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다. 연금은 개개인들에게는 직업 선택이나 인생 주기에 따른 장기적 재무 설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는 계층 간, 세대 간 재분배 계약이다. 당연히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하며, 그렇다는 확신을 줄 때 제도가 시민들의 순응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안정적이어야 할 연금이 어떤 이유에서인가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개혁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이해 당사자들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합의와 지지가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영국에서 대중적 협의를 통한 합의 형성 과정은 증세에 대한 동의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영국의 합의적 개혁 경험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영국이 집권 정부가 일방주의적 정책 결정을 하기 수월한 제도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대결의 정치 문화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음에도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이런 합의적 개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금 개혁은 아마도 외교 안보 정책과 더불어 저출산·고령화의 위험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초당적·합의적 정책 결정이 필요한 영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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