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에 맞선 유색인의 자기비판
상태바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에 맞선 유색인의 자기비판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7.30 0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그렇지만 나는 한 사람이다”
▲ 프란츠 파농

한때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백인을 동경해 피부색을 바꿨다는 루머가 돈 적이 있었다. 흑인인 마이클 잭슨의 피부색이 변화하면서 떠도는 루머였다.

그러나 그는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 더구나 1984년 펩시 광고 촬영 당시 그의 머리에서 떨어진 폭죽으로 인한 화상은 그의 백반증을 심화시켰다.

그의 흰색 메이크업도 멜라닌 세포 파괴로 인한 하얀 반점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섬 마르티니크는 프랑스령이다. 앙티유 군도에 속하는 이 섬은 17세기 이후 줄곧 프랑스 식민지였다.

인종적으로는 흑백 혼혈이 대다수인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피지배자가 아닌 프랑스인으로 여긴다. 그들은 흑인이지만 정신적으론 이미 백인이다.

그러나 본토인 프랑스 땅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다.

마이클 잭슨과 마르티니크인들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오간다. 타인에 의해 덧씌워졌든 혹은 스스로에 의해서든 백인을 닮고 싶어 하고 백인에 동화되고 싶은 유색인의 자화상이다.

백인은 문명인이요, 검둥이는 야만인이라는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 도식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문학동네)은 백인 문명에 종속된 유색인의 정체성 자각과 정신적 해방을 모색한다.

프란츠 파농은 마르티니크 섬 출신이다. 아프리카계 흑인 아버지와 흑백 혼혈인 물라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알제리 혁명의 투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종주의·식민주의에 대한 심리학적(정신분석적) 분석과 유색인종의 혼종적 정체성을 다룬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자 했던 파농은 프로이트, 융, 아들러를 비롯해 당시로선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까지 끌어와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의 심리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동안 알고 있던 알제리 혁명투사의 파농이 아니라 심리학적·정신분석학적 의사로서의 파농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전히 정신과 의사만의 모습은 아니다. 파농은 여전히 혁명가로 탈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항한다.

이 책에는 프로이트, 아들러, 융, 마노니에서 안나 프로이트, 제르멘 게, 헬레네 도이치, 피에르 자네까지 숱한 정신분석가가 등장한다. 파농이 정신분석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책에서 마치 자신을 대상으로 분석수련을 하듯 철저하게 스스로를 해부했다.

파농은 특히 라캉에게서 상당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거울 단계’나 ‘이마고(Imago)’ 같은 개념의 사용에서 그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거울 단계’는 라캉 정신분석의 초기 이론을 대표하는데,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형성과 주체의 소외 문제는 파농이 식민지 흑인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생후 6개월 된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총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이상적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상상계’의 국면에서 거울에 비친 상이 곧 이마고다.

이를 식민지 상황에 적용하면 식민지 흑인이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대상은 백인이다. 흑인의 이상적 자아는 백인인 것이다.

6장 ‘검둥이와 정신병리학’ 주25에서 파농은 거울 단계를 가지고 흑백 심리를 길게 논의하는데, 이때 앙티유의 10~14세 아이들이 작문을 하면서 ‘파리 아이들’처럼 이야기하는 사례를 든다.

“나는 방학을 사랑해요. 왜냐하면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두 뺨이 발그레해져서 돌아올 테니까요.”

마치 자신이 백인 아이인 것처럼 “뺨이 발그레해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반대로 백인에게 흑인은 진정한 ‘타자’다. 그들에게 흑인은 이상적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흑인은 백인이라는 타자의 정신에 결박된 존재다. 흑인의 의식은 백인이라는 타자의 눈길을 거쳐서만 자신을 객관화(상대화)하게 된다. 흑인은 제 안에선 흑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타자의 눈길 앞에서 자신의 검은 피부색, 흑인의 신체 도식을 벗어날 수 없다.

유색인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 존재의 자리로 상승해 어엿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되는 길은 백인이 될 때뿐이다. 유색인은 자기로 인정받기보다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다.

이 책의 선언과 분석은 유색인이 흑인임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우월적 지위를 누린 유색인이 언제든 검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검둥이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인정하게 되는 과정, 피부색 편견을 지닌 자의 특수성을 극복하고 흑인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길로 보인다.

하지만 파농의 진면목은 인정 투쟁에 휘말린 흑인의 존재가 자기정체성을 인식할 때 거짓 술수가 끼어든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식민지인은 식민지배자가 심어준 형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따라서 정교한 자기해체 없이는 올바로 자신을 볼 수 없고 여기에 파농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전유하고자 했던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파농이 정신분석학에 완전히 매몰된 건 아니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해선 날선 비판을 가했다. 프로이트, 아들러, 융의 정신분석이 흑인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프랑스령 앙티유 가정 가운데 97퍼센트에선 오이디푸스 신경증이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비교적 쉽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현상이 문명화되지 못해 그런 것이라면 그렇다고 치자고, 자신은 오히려 근친의 욕망이 없다는 것을 자축하고 싶다고 드러내놓고 비꼰다.

서구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해 지식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놓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프랑스만 해도 20세기 초 아나톨 프랑스, 펠리시앙 샬레의 문제제기가 있었고 초현실주의도 이에 동참했지만 몇 안 되는 변방의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지식인들은 식민지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르트르조차 식민지 문제를 직접 언급한 것은 1956년에 이르러서였다. 서구 사회의 백인 지식인들에게 식민지 또는 흑인은 어둠 속에 묻힌 절대적 타자의 세계였다.

파농이 알제리혁명과 더불어 본격적인 반식민 투쟁에 나선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지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이미 파농은 정신적 식민성의 극복을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었다.

이 책이 탈식민주의 논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농이 이 문제에 천착한 것은 마르티니크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파농이 자란 섬은 복잡한 혼혈 문화와 장구한 식민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이곳 식민지 사회는 전통적으로 세 신분, 즉 백인 정착민, 자유 유색인, 흑인노예가 서열을 이루고 있었다. 서인도제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같은 유색인이라도 피부색이 하얄수록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파농은 아버지가 아프리카계 흑인이었지만 어머니가 흑백 혼혈인 물라토였다.

파농이 이 책에서 예로 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는 그곳 사회계급의 실상이 담겨 있다.

백인, 물라토, 흑인 세 사람이 천국에 갔다. 베드로 성인이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백인은 “돈”이라고 답했다. 다음엔 물라토에게 물었다. 물라토에게서 “영광”이란 답이 돌아왔다.

끝으로 베드로가 흑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흑인이 잘라 말했다. “저는 이 나리들의 짐 가방을 나르러 왔습니다.”

여기서 암시되는 세 계급의 표상은 경제를 장악하길 바라는 백인 지배자, 사회적 지위를 얻어 백인과 동등해지길 갈망하는 유색인, 마지막으로 두 계급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욕망을 거세당한 흑인이다.

2차 대전 때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자원했던 파농은 군대에서 또 다른 차별을 목격한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말과 글,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안으로 흡수하려 했던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서인도제도 출신 병사들은 백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처우를 받았지만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군대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모집한 세네갈 연대 병사들은 가장 밑바닥이었다.

정신적으론 스스로 ‘백인’이라 여기는 앙티유인은 세네갈 병사들과 똑같이 검둥이 취급을 받으면 모욕으로 여긴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서인도제도 출신처럼 보이려고 애써 크레올어를 배우기도 한다.

파농은 앙티유인과 세네갈인이 보이는 이런 태도들이야말로 자기부정이자 소외라고 본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파농으로 하여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성찰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인종주의와 식민주의를 자각한 파농은 백인 문명을 심판해야 한다거나 부당하게 무시당한 흑인 문명을 되살려야 한다거나 하는 입장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정신적 식민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파농은 ‘현재’와 ‘개인’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흑인은, 아무리 진실해도 과거의 노예다. 그렇지만 나는 한 사람이다. … 나는 어떤 과거라 할지라도 그 과거로 나를 만들지는 않겠다.”

파농은 흑인도, 백인도 과거,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선언한다. “검둥이의 사명은 없다. 백인의 짐도 없다.”

파농의 관심사는 유색인이 정신적 식민성, 곧 ‘정신적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마지막에 이르러 파농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외의 극복, 존재의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인이냐 흑인이냐의 도식을 뛰어넘는 ‘도약’이 필요하다.

이 책 서문에서 파농은 백인은 자신의 흰색에 갇혀 있고, 흑인은 자신의 검은색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파농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의 도정에서 자기해체를 거쳐 도달한 지점은 흑인도, 백인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실존이며, 그것이 그가 꿈꾸던 자유, 해방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