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살아있는 생물(生物)…이치·논리 무시한 문자 꾸미기는 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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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살아있는 생물(生物)…이치·논리 무시한 문자 꾸미기는 기예”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3.23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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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⑥
▲ <청공도(淸供圖)>, 강세황, 19.1×24.3, 18세기,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계곡 장유는 ‘문장의 중심은 논리(文主於理)’라는 글에서 “문장은 논리를 중심으로 지어야 한다. 글 전체에 논리가 잘 갖추어져 있으면, 그 글은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논리를 갖추고 있지 않아도 아름다운 글이 있기는 하지만 군자는 그러한 글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 문장의 규범이 될 만한 글을 뽑아서 『동문수(東文粹)』라는 책을 엮은 신종수는 “문장이란 이치와 논리로 이뤄진다. 이치와 논리를 무시하고 문자로 꾸미는 하잘것없는 기예에만 매달려 아로새기고 수놓아 장식하는 것을 솜씨로 삼으며 기이하고 험하고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모두 멀리해야 한다. 시대정신에 절실하고 의로움과 이치에 밝은 문장만을 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홍길주는 글은 살아있는 생물(生物)과 같다면서 ‘제목과 내용과 형식’이 한 몸처럼 어우러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제목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글이란 크게 짓거나 작게 짓거나에 상관하지 않고 제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이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에 다름없다.

예를 들어 아주 더럽고 저속한 사물을 제목으로 삼았다면 거기에 걸맞은 논리와 이치를 담아 그 비루하고 더러운 모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더럽고 저속한 사물을 제목으로 삼았는데 고상한 논리와 우아한 이치를 글 속에 담는다면 오히려 그 비루하고 더러운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또한 온전히 전달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글을 지을 때 제목에 구속되어 문장이 추구해야 할 원칙과 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원칙과 기준에 구속되어 제목에 맞지 않는 글이 나오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좋은 글을 지을 수 없다. 오로지 본래의 제목을 간곡하고 정성스럽게 그리면서도 자연스럽게 문장의 원칙과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만족할 만한 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이른바 원칙과 기준이란 글의 본 제목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제목과 동떨어져 원칙과 기준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누가 더 중요하냐며 승부를 겨룰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지을 때 특정한 제목으로는 글을 짓기 어렵다고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글을 짓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대체로 글의 제목에서는 본래 어렵거나 쉬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짓는 사람이 문장의 근본과 원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평소 제목에 따라 목표를 세워 놓고 겉으로 드러나 껍데기만 베끼기 때문에 어렵거나 쉽게 생각될 뿐이다. 생각은 통할 수도 있고, 막힐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글을 잘 짓은 옛 문장가들의 작품 중에도 얻고 잃은 것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지은 글을 보면 제목과 내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시냇가의 조그마한 돌멩이를 읊으면서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하여 봉래산이나 영주산을 만들어 놓는다. 이런 까닭에 정작 이름 높은 산이나 큰 강을 마주하면 붓을 들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글이란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生物)이라고 할 수 있다. 마땅히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 그 제목에 걸맞아야 한다. 되(升)를 제목으로 삼았다면 글은 약(龠: 한 홉의 1/10)이 되어서도 안 되고 말(斗)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한 국자도 열 말의 분량이라고 하고 되나 약이나 말도 열 말의 분량이라고 표현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아주 더럽고 저속한 사물을 제목으로 삼았다면 그 비루하고 더러운 모습을 온 힘을 쏟아 비슷하게나마 표현해 사람들이 그 참 모습을 눈앞에서 보듯 해야 한다. 혹시라도 글이 아름답지 못할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붓과 먹이 더럽혀질까봐 우아하게 말을 꾸미는 바람에 읽는 사람이 미녀나 보배를 표현한 것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뛰어난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홍길주, 『수여방필』

더욱이 이수광은 진후산의 말을 인용해 글 속에서 논리와 이치의 전개(展開)와 전환(轉換)과 변화(變化)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비로소 문장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장을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물을 논리적으로 서술해 기이한 지경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처럼 한다. 문장을 강물에 비유하자면 부드럽고 온화하게 아래로 흘러가는 듯 하다가 산에 부딪치고 막혀 계곡을 내달리며 바람과 마주치고 갖가지 사물과 격돌한 다음에야 세상의 온갖 변화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수광, 『지봉유설』, ‘문장(文)’

또한 김정희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 중 정신과 이치(논리)와 기운과 묘미는 문장의 내용이고 격조와 음률과 소리와 색깔은 문장의 형식이라고 지적한다. 이 여덟 가지 가운데에서도 작가의 정신과 글의 이치(논리)는 문장이 갖추어야 할 핵심 중의 핵심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그 글은 결코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이용휴는 글이란 비록 자신의 뜻과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글 속에는 고집과 편견에서 벗어난 이치와 논리가 담겨 있어야 ‘참된 견식(眞見)’이 있게 되고 ‘참된 재지(眞才)’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시문은 남을 따라서 의견을 내세우는 자가 있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의견을 내세우는 자도 있다. 남을 따라서 의견을 내세우는 자는 비루해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의견을 내세우는 자도 고집과 편견이 그 안에 섞여 있지 않아야만 ‘진정한 견식’이 되는 것이고 또 반드시 ‘참된 재자’를 기다려서 보완을 한 뒤에야 비로소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용휴, 『송목관집』 서문(松穆館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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