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② 회암(晦庵)을 우러러 본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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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晦齋) 이언적② 회암(晦庵)을 우러러 본받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8.0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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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⑥
▲ 주자(朱子)의 초상. 이언적은 무이산에 은둔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해 유학사를 빛낸 주자를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유래한 ‘회재(晦齋)’를 호(號)로 삼았다.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그런데 낙향한 이언적은 자신으로 인해 고향 마을에 화가 미칠까 염려해 따로 자옥산(紫玉山) 기슭에 거처를 짓고 은거했다.

입신양명의 뜻을 접은 이언적은 학문에 몰두하며 세월을 보냈다.

무이산에 은둔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해 유학사를 빛낸 주자를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유래한 ‘회재(晦齋)’를 호(號)로 삼았던 이언적은 실제로 주자처럼 은둔한 채 홀로 학문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회(晦)’자의 뜻이 ‘감추다 혹은 숨기다’이니 이언적의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언적은 당시 거처하던 곳의 이름까지 ‘독락당(獨樂堂)’이라 붙이고 어지러운 세상과 부패한 권력에 등을 진 채 ‘홀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산의 거처에서 병이 일어나(山堂病起)’나 주자의 무이오곡(武夷五曲)에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에는 이언적의 이러한 뜻이 잘 새겨져 있다.

“평생의 뜻과 일을 경전 연구에 두었으니 / 구차하게 이로움과 명예를 탐하지 않네 / 선(善)을 밝히고 정성껏 몸을 닦아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되기를 바라고 / 마음 다스리고 도(道)를 보존하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흠모하네 / 나아가면 세상을 구제하고 충의(忠義)에 의지했고 / 어려움에 처하면 산으로 돌아와 성령(性靈)을 기르네 / 어찌 인생사 굴곡이 많다고 불쾌하게 여기겠는가 / 깊은 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앞 기둥에 기대어 보네.” 『회재집(晦齋集)』, ‘산의 거처에서 병이 일어나’

“남기신 경전 흠모하고 음미하여 깊은 뜻 얻었네 / 진리 탐구는 예부터 산림(山林)에서 있었지 / 아양(峨洋)이라는 거문고의 곡조 누가 알겠는가 / 흉중(胸中)의 태고 적 도심(道心)을 홀로 어루만지네.” 『회재집』, ‘주자의 무이오곡에 차운하여(次朱文公武夷五曲韻)’

독락당은 이언적이 낙향한 다음해(1532년. 나이 42세)에 양좌촌(양동마을)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자옥산(紫玉山) 기슭 계곡 가에 세운 10여 칸의 처소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다가 ‘홀로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하는 생활을 즐긴다’는 뜻을 담아 ‘독락당(獨樂堂)’이라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 경관 하나하나에 자신만의 의미를 담고 질서를 부여해 ‘벗’으로 삼았다.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삶을 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이른바 ‘4산5대(四山五臺)’라고 불리는 이언적의 유적(遺跡)이다.

이언적은 독락당이 자리한 계곡의 북쪽 봉우리는 도덕산(道德山),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무학산(舞鶴山), 동쪽의 봉우리는 화개산(華蓋山), 서쪽의 봉우리는 자옥산(紫玉山)이라고 이름 붙였다. 도덕산, 무학산, 화개산, 자옥산이 바로 ‘4산(四山)’이다.

그리고 이언적은 계곡의 바위들 중 다섯 군데를 골라서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그리고 세심대(洗心臺)라고 이름 지었다. 이 다섯 곳의 바위가 바로 ‘5대(五臺)’이다.

이언적이 회재(晦齋)라는 호 이외에 ‘자계옹(紫溪翁)’이라는 또 다른 호를 사용한 시기 역시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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