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따르면 바람이 불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벼락이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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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따르면 바람이 불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벼락이 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5.10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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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3강 순명편(順命篇)…운명에 순응하라④
▲ 초당사절(初唐四節)로 불린 왕발(王勃:오른쪽)과 꿈속 노인이 백일장에 참석하라며 알려준 등왕각.

[명심보감 인문학] 제3강 순명편(順命篇)…운명에 순응하라④

[한정주=역사평론가] 時來風送滕王閣(시래풍송등왕각)이요 運退雷轟薦福碑(운퇴뢰굉천복비)이니라.
(때를 만나면 바람이 불어 등왕각(滕王閣)으로 보내고, 운이 다하면 벼락이 쳐서 천복비(薦福碑)가 깨지네.)

등왕각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아들 이원영이 세운 누각이다. 지금 중국 강서성 남창부 신건현에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 초기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과 더불어 시문에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해서 초당사절(初唐四節)이라고 불린 왕발(王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왕발은 어릴 적 동정호 부근에 머물 때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9월9일 등왕각을 중수하는 낙성잔치 때 ‘등왕각(滕王閣) 중수서문(重修序文)’을 짓는 백일장이 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해 문장을 지으라고 일러준다.

왕발이 꿈을 꾼 날은 9월7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에서 등왕각이 있는 강서성 남창현까지는 무려 700리나 떨어져 있었다. 시간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9월9일까지 등왕각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왕발은 너무도 생생한 꿈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등왕각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그런데 때맞춰 순풍이 불어 왕발은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등왕각에 무사히 도착해 ‘등왕각서(滕王閣序)’을 지을 수 있었다.

이때 왕발이 지은 ‘등왕각서’는 명문장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후 왕발은 천하에 크게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왕발의 이야기는 운이 따르면 때에 맞춰서 운이 작용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천복비 이야기는 운이 작용하는 데에는 왕발의 고사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천복비는 강서성 천복사에 있는 비석이다. 당나라 때 명필가 구양순이 그 비문을 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북송 초기 때 재상을 지낸 구준(寇準)에게는 문정(文正)이라는 매우 가난한 문객이 있었다. 문정이라는 사람이 당대의 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범중엄에게 시를 지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범중엄이 천복사 비문을 탁본해오면 후하게 보수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이에 문정은 수천리 길을 달려가서 천복사에 도착했는데, 그날 밤 벼락이 쳐서 비석이 산산조각이 나는 바람에 탁본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문정의 이야기는 운이 따르지 않으면 제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알려준다.

옛 사람들은 운은 사람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사람의 의지에 따라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즉 일을 할 때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과 능력을 쏟되 그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은 일의 성사 여부는 운의 유무(有無)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운만 바라보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운이 있는가 없는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운을 지나치게 따지거나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로 들어야 한다.

또한 사람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일에는 운이란 것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 성패 여부에 지나치게 낙심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로 들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과 운의 작용은 별개의 문제여서 그것들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있지만 때로는 어긋나기도 한다. 혹은 사람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사되는 일도 있고 혹은 운이 작용해서 성사되는 일도 있고 혹은 운이 작용하지 않아서 실패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왕발의 고사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담담하게 운의 작용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확실하게 깨우쳐준다. 만약 왕발이 정해진 날짜까지 등왕각에 도착할 수 없다고 지레 짐작해 포기하고 배에 오르지도 않았다면 아무리 순풍이 불었다고 해도 왕발은 등왕각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무작정 배에 오른 것이 왕발의 ‘진인사(盡人事)’라면 때맞춰 순풍이 불어준 것은 왕발의 ‘대천명(待天命)’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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