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文亭)의 고장에서 무정(武亭)의 맥 잇는 유일 활터…담양 총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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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文亭)의 고장에서 무정(武亭)의 맥 잇는 유일 활터…담양 총무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8.10.11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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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⑥ 관방제림 둘러친 죽림(竹林) 사정(射亭)…고목 숲 ‘백미’
▲ 관방제림에서 내려다본 담양 총무정 사정(射亭)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활터 가는 길]⑥ 관방제림 둘러친 죽림(竹林) 사정(射亭)…고목 숲 ‘백미’

“따악 따악 따악…”

시뻘건 화기가 가득한 아궁이 속에서 잔뜩 팽창한 대나무는 지글지글 끓더니 마침내 로켓처럼 튀어 올랐다. 옆에서 잔가지를 집어넣던 친구 녀석이 화들짝 놀라 팔뚝에 달라붙은 불티를 털어내며 그만 넉장거리로 자빠졌다.

대입 학력고사를 마치고 담양 친구집을 찾은 그날은 금방이라도 문풍지를 찢어버릴 듯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세밑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10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시와 소설에 대한 치기어린 논쟁으로 짧은 겨울밤을 보냈다.

그날 아궁이 속에서 제 몸을 태워 방구들을 데우는 땔감으로 담양에서는 대나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기야 지천으로 널린 게 대나무다 보니 타지 사람이 보면 생경했을지 몰라도 담양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대나무라는 놈을 태울 때 자칫 실명(失明)할 수도 있다는 친구의 농담 아닌 농담은 실제 아궁이 앞에 앉은 이들만이 실감할 수 있는, 그저 웃고 넘길 말이 아니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마르질 않아 약간은 푸르스름한 대나무 몇 개를 아궁이 속으로 집어넣자 사르륵 댓잎이 타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반지르르한 겉면엔 보일 듯 말 듯 이슬이 맺혀 끓어오른다. 이때 얼굴을 들이밀어 넣은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다.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고 마는 것이다. 불꽃놀이라면 과장이겠지만 사방으로 불티가 튀는 것은 보너스다.

“재로 사라지기 전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대나무가 내뱉을 수 있는 처절하면서 가장 슬픈 아우성”이라는 일기장 속의 메모가 지금은 낯설기만 하다.

벌써 35년 전이다. 담양의 겨울밤을 공유하고 있을 친구들은 대학 진학으로 각기 다른 도시를 선택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몇몇은 안부조차 주고받지 못한 채 50대 중반의 중년으로 살고 있다.

▲ 무겁에서 본 총무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 대나무와 누정의 고장…사라진 무정(武亭)의 부활
깊어가는 가을 아침의 담양 가는 길에는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았다. 광주광역시 외곽의 제2순환로를 타고 문흥IC를 빠져나갈 때만 해도 멀쩡했던 시야가 고서면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뿌옇게 바뀌었다.

송강정, 면앙정, 환벽당, 소쇄원, 죽녹원…. 익숙한 표지판들이 도로를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다. 여유 있게 차분히 한 곳씩 둘러보았으면 싶었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속도를 높였다.

담양은 대나무와 누정(樓亭)의 고장이다. 대숲은 담양 어디에서든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발품이 필요하다. 압권은 대나무골 테마공원이다. 담양읍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순창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성면 봉서리 병풍산 줄기의 고지산 아래 담양호가 펼쳐지고 주변으론 추월산과 금성산성이 하늘을 가리는 곳에 담양 최대의 대나무숲이 들어서 있다.

죽녹원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숲이다. 대나무골 테마공원이 규모에서 장관이라면 죽녹원은 아기자기한 맛이 일품이다. 대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힘들면 대나무 정자에 누운다. 이때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소리를 듣고 있자면 여기가 신선이 사는 봉래도가 아닌지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한 착각 때문이었을까. 담양에는 유독 세상사에서 벗어나 누정을 짓고 자연과 벗을 하며 살았던 이들이 많았다.

누정은 흔히 경치가 빼어난 곳에 들어서 있다. 담양의 정자는 무등산, 추월산, 금성산 등의 명산과 함께 영산강이 발원하는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한다. 16세기 기묘사화 이후 사림(士林)의 수난시대를 피해 낙향한 인사들이 조용한 은거의 정서를 찾아 대숲, 즉 죽림(竹林)으로 몸을 숨긴 것은 또 사회적 배경이다.

이때 집중적으로 건립된 담양의 정자는 시문의 산실로, 강학의 전당으로 오늘날까지 대략 80여개가 전해오고 있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풍암정, 송강정, 죽록정, 명앙정 등등 교과서에서 익힌 이름만으로도 벌써 익숙하다.

특히 이들 누정에서 탄생한 가사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보적이다. 송순이 면앙정에서 지었다는 『면앙정가(俛仰亭歌)』, 정철이 송강정에서 지었다는 『성산별곡(星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 아침 안개가 벗겨지고 있는 총무정 무겁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그러나 문정(文亭)만으로 누정의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문정이 있다면 무예를 연마하는 쓰임새로 사용했던 무정(武亭)도 있다.

담양에도 조선 중기 문신인 김복억(金福億: 1524년(중종19년)∼1600년(선조33)) 고서면 분향리 용대마을 용담대(龍潭臺) 아래 냇가에 정자를 짓고 연무(鍊武)라 이름 붙인 활터가 있었다.

호남창평지(湖南昌平誌) 본현선생안(本縣先生案)에는 김복억이 담양군 창평현의 옛이름인 명양(鳴陽) 현령으로 “무자년(1588년)에 도임하여 승진하여 옮겨갔다”고 적고 있다. 그가 담양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2년 남짓으로 추정되지만 그로 인해 담양의 활터 역사는 시작된다.

연무정의 위치는 18세기 중엽 제작된 ‘비변사인 방안지도(備邊司印 方眼地圖)’에 와치헌(臥治軒)·추성각(秋城閣) 등과 함께 읍성 안에 표기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 창평현(昌平縣) 누정조에는 연무정이 “창평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산록에 기암이 있는데 높이가 백 자나 된다. 남쪽으로는 서석(瑞石)이 바라보이고 아래로는 맑은 못이 있다. 이름을 용담대라 하는데 그 옆에 승사(僧舍)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추성각이 있던 자리가 현재의 담양동초등학교 정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체국이 있었고 추성각은 우체국부속건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현재의 담양읍 담주리 어느 곳에 연무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무정 이후 1629년(인조7년) 담양부사 이윤우가 활터를 창건하고 1758년(영조34년)에는 객사리 22-1번지에 향사당(鄕射堂)이라는 활터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1978년 군에 의해 철거돼 새 군수의 관사가 건립되면서 흔적이 사라졌다.

▲ 총무정 현판 옆에 걸린 사정 건립 기부자 명단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 사정기(射亭記)조차 없는 활터…보유 편액은 단 두 개
기록만으로 남아있는 이들 활터와 달리 오늘날 담양을 대표하는 유일의 활터는 담양읍 객사리에 자리하고 있는 총무정(摠武亭)이다. 1850년 양각리 양각산 남쪽 영산강의 상류인 백진강가에 향사당 생도들이 활을 쏘는 교육장으로 사용했던 강무당(講武當)에서 유래한 활터다.

1920년대 초 강무당이 오래돼 허물어지자 친척관계였던 지역유지 3명이 강무당을 철거하고 새로 건축해 강무정(講武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들과 관계가 불편했던 동변면의 강씨·초계 정씨·담양 국씨 등이 1936년 지역유지 36명을 모아 과수원과 자갈밭이었던 현 위치에 그해 5월 사정(射亭)을 건축했다.

당시 이들이 모금한 돈은 2556원으로 알려졌다. 80kg 쌀 한 가마니가 12원 정도였다 하니 모금액은 213가마니 분량에 달한다. 모금에 참여했던 36명의 명단은 현재 총무정 현판 옆에 편액으로 제작돼 걸려 있다.

총무정의 초기 명칭은 석호정(石虎亭)이었다. 총무정으로 바뀐 것은 1939년이었다. 사대는 정동쪽 과녁을 향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전면에는 방풍식 지붕형식으로 슬레이트 채양을 길게 내달았으며 채양 밑으로 3개의 활주(活柱)가 받치고 있었다. 대들보에는 아직도 ‘河 檀紀四千二百六十九年丙子三月二十三日丙寅卯時立柱同日酉峕 上樑 洛龜’이라는 상량문 글씨가 뚜렷하다.

▲ 총무정 대들보에는 아직 상량문 글씨가 뚜렷하다. <사진=한정곤 기자>

1984년에는 담양군에 사정의 재산일체를 무상기증해 영구보존과 관리를 맡겨 이듬해 봄 군비 1000만원을 보조받아 총 4칸으로 증축했고 10여년 전 사대확장과 과녁 확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지금은 증축한 1칸을 비롯해 맞닿은 또 다른 1칸을 합해 2칸은 궁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2칸 마루에는 각종 대회 우승컵 등을 진열하고 있다.

총무정 사대에서 무겁을 향해 왼쪽으로는 길게 뚝방길이 이어진다. 총무정 풍광의 백미인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푸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음나무, 개서어나무, 곰의 말채나무, 벚나무, 은단풍 등 다양한 낙엽성 활엽수들이 서로 굵기와 키를 재고 있으며 최고 수령은 300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1648년(인조26년) 담양 부사 성이성(成以性)이 영산강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며 1854년(철종5년)에는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다시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했다.

세월이 녹아들면서 관방제림의 고목 숲은 담양 사람들에게 호젓한 휴식처로, 외지인들에게는 관광지로, 활꾼들에게는 멋드러진 활터 풍광을 제공하고 있다.

▲ 총무정 왼쪽의 관방제림길. 건너편은 영산강 상류다. <사진=한정곤 기자>

◇ 간송 미술관의 산파 오세창이 이름 지은 활터
80년이 넘은 역사와 전통을 보유한 총무정이지만 속내들 들여다보면 허전하다. 사정기(射亭記)조차 하나 없이 보유하고 있는 편액은 현판과 사정 건축 기부자의 명단인 ‘석호정신축기념방명(石虎亭新築紀念芳名)’ 단 두 개가 전부다. 4개의 주련(柱聯)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현판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글씨다. 이전까지 석호정이었던 활터는 이때부터 총무정으로 불리게 된다. 오세창의 서예는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로 위창체 혹은 오세창체로 불린다. 일부에서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를 능가한다는 평가도 있다.

오세창이 총무정의 현판 글씨를 쓰게 된 인연에 대해 총무정 최정기 사원은 구사(舊射)들의 증언을 토대로 세 가지 설(說)을 내놓는다.

당시 동아일보에 재직중이던 국태일 씨의 부탁이라는 게 첫 번째고,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금성면 출신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사장이 같은 언론인 친분으로 부탁했다는 게 두 번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총무정 사두를 지낸 강종우 사원이 서울에서 가져왔다고 아들인 강인수 전 사두가 주장한단다.

오세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오세창에 대한 극히 일부분적인 평가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안목을 바탕으로 한 수집가로서의 역할과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연구한 업적은 오직 오세창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 위창 오세창(왼쪽)과 총무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吳慶錫)은 역관으로 개화파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금석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금석학과 서화(書畵)를 공부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은 오세창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서화 활동에만 매진해 전서와 예서에서 높은 경지를 보였고 고서화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부친이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제자로 고서화 수집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는 부친의 스승과 부친으로부터 전수·계승돼 우리 문화유산 수집에서 하나의 큰 봉오리로 완성됐다고 미술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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