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말만 듣는다면”…헌공의 어리석음이 부른 살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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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말만 듣는다면”…헌공의 어리석음이 부른 살육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10.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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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㉑
▲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헌공(獻公) 역시 애첩인 여희(驪姬)를 지나치게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말만 듣다가 권력을 둘러싼 자식과 신하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불러일으켰다.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㉑

[한정주=역사평론가] 若聽一面說(약청일면설)이면 便見相離別(변견상이별)이니라.

(만약 한쪽 말만 듣는다면 문득 서로 갈라서는 모습을 볼 것이다.)

『한비자』에는 ‘망국의 징조’라는 뜻의 <망징(亡徵)> 편이 있다. 여기에서 한비자는 나라가 망하는 마흔 일곱 가지 사례를 하나씩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그 여섯 번째 사례에서 한비자는 “임금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의 말만 듣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말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라의 걸왕은 말희의 말만 듣고,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의 말만 들었기 때문에 폭군으로 전락하고 나라는 멸망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의 진나라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한 까닭 역시 제2대 황제인 호해(胡亥)가 환관 조고(趙高)의 말만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쇠락하거나 멸망한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드시 임금의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하는 측실 혹은 간신과 더불어 한 사람의 말만 듣다가 나라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용군(庸君)이나 혼군(昏君)이 등장한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헌공(獻公) 역시 애첩인 여희(驪姬)를 지나치게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말만 듣다가 권력을 둘러싼 자식과 신하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불러일으켰다.

『사기』 <진세가(晋世家)>를 보면 헌공은 제후로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애첩 여희를 얻었다. 헌공은 첫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신생(申生), 또 다른 두 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중이(重耳)와 이오(夷吾)가 있었다.

그런데 여희와의 사이에서 해제(奚齊)를 낳았고, 다시 여희의 동생인 소희와의 사이에서 탁자(卓子)라는 아들을 낳았다.

당시 헌공의 자리를 이을 태자는 신생이었다. 그런데 여희는 자신이 낳은 해제를 태자로 삼고자 신생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여희는 거짓으로 태자를 위하는 척 계략을 꾸며서 헌공이 점점 더 신생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결국 여희는 독약을 넣은 술과 음식을 준비한 다음 교묘하게 말을 꾸며 태자 신생이 직접 헌공에게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헌공이 술과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달려들어 밖에서 들어온 음식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한다면서 음식은 개에게 던져주고 술은 신분이 낮은 신하에게 마시게 했다. 독약을 넣은 술과 음식을 먹은 개와 신하는 당연히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신생은 스승인 태부(太傅) 이극(里克)의 간곡한 만류에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하지만 여희는 태자 신생을 죽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이와 이오 역시 신생이 술과 음식에 독약을 넣어 헌공을 시해하려고 한 일을 알고 있었다는 모함을 해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낌새를 눈치 챈 중이는 포성으로, 이오는 굴성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즉위한 지 26년째 되는 해 죽음을 앞둔 헌공은 신하 순식에게 “여희의 아들인 해제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해 가을 9월 헌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희의 바람대로 해제는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헌공의 장례를 지내는 곳에서 태자 신생의 스승이었던 이극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 뒤를 이어 여희의 동생 소희의 아들인 탁자가 제후가 되었으나 그 역시 이극에 의해 조정에서 살해당했다.

그럼 여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 역시 죄를 받아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이극 등 진나라의 신하들은 서열에 따라 적나라에서 망명 중이던 중이를 데려와 제후의 자리를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중이는 끝까지 제후의 자리를 사양했다. 이에 이극과 신하들은 양나라에서 망명 중이던 이오를 데려와 제후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오는 재위 1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어(圄)가 다음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나라의 신하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헌공의 아들인 중이를 다시 설득해 데리고 와서 제후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 중이가 앞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 진(晋)나라의 문공(文公)이다. 결국 여희의 말에 미혹된 헌공의 어리석음 때문에 진나라는 무려 5대에 걸쳐 난세(亂世)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헌공은 여희의 간악한 계략과 참언을 물리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처음 헌공이 여융을 정벌할 때 점치는 자가 “참소가 재앙의 뿌리가 될 것입니다”라는 간언을 올리면서 애첩 여희에 대한 지나친 총애 때문에 그녀의 말만 듣게 되는 일을 경계하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또한 여희가 태자 신생을 폐위시키려는 목적으로 계략을 꾸며서 모함을 할 때에도 태부 이극이 나서서 “나라의 근본인 태자를 지켜야 한다”는 간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헌공은 여희의 말만 들을 뿐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신들의 간언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렇듯 여러 사람의 의견은 무시한 채 총애하는 한 사람의 말만 들은 헌공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식과 신하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불러일으킨 근본 원인이었다고 하겠다.

『명심보감』의 격언대로 “한쪽 말만 듣는다면 문득 서로 갈라서는 모습”을 본 셈인데 헌공과 여희의 사례는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또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갈라서는 모습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대가를 치른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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