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붐의 시초는 조선 퇴직 관료들?”…『조선을 읽다 서울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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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붐의 시초는 조선 퇴직 관료들?”…『조선을 읽다 서울을 느끼다』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8.11.0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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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누정의 대부분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 혹은 지식인들이 향유하던 시설이다.

왕은 자신이 머무는 궁궐 안에는 물론 한강변에도 누정을 지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선비들이나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처사, 은둔자들과 벼슬에서 퇴직한 사대부들도 자연과 어우러지는 누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면서 주위의 풍치를 즐기는 도가적 삶을 살고자 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 시사편찬과장은 최근 펴낸 신간 『조선을 읽다 서울을 느끼다』(역사인)에서 “한강 이남에 있었던 대부분의 정자들을 소유하고 있던 개인들은 모두 퇴직한 관료들이었다”고 소개했다.

저자는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족들의 정자가 한강변에 많이 만들어졌고, 후기로 갈수록 사대부들의 정자가 늘어났다”면서 “왕들이 한강에서 군사훈련도 하고 외국 사신을 대상으로 각종 연회를 베풀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왕과 왕족의 누정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제천정·망원정·낙천정·화양정·용양봉저정 등이 대표적으로 외국 사신의 접대장소이자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장소로 사용된 누정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했고 빠른 시간에 도성에 당도하기가 쉽지 않아 현직 관료들이 머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저자는 “한강 남쪽에 누정을 짓는다는 것은 관직을 버리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머무는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누각에 남긴 문화적 흔적으로 보면 현직 관리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지만 누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자에 남긴 발자취를 보면 자연에 소요자적하거나 은둔하던 퇴직 관료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책에는 우리가 몰랐던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 즉 한양의 탄생 과정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어 생활한 백성들의 모습에서부터 궁궐을 중심으로 한 흥망성쇠, 5개 궁궐의 역사와 문화,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환경 등이 소개된다.

저자는 “서울은 수많은 역사상을 품고 있는 양파같은 도시”라며 “무수한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하나하나 탐구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우리의 수도 서울”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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