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는 가난한 곳에서 끊어지고 인정은 돈 있는 집으로 향한다”
상태바
“의리는 가난한 곳에서 끊어지고 인정은 돈 있는 집으로 향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12.21 0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㊲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㊲

[한정주=역사평론가] 人義(인의)는 盡從貧處斷(진종빈처단)이요 世情(세정)은 便向有錢家(변향유전가)니라.

(사람의 의리는 모두 가난한 곳에서 끊어지고, 세상의 인정은 곧 돈 있는 집으로 향한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동주(東周) 낙양 출신으로 당시 종횡가(縱橫家)로 명성이 높았던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웠다.

소진은 이 시대에 활동한 수많은 유세객(遊說客)들처럼 제후에게 유세해 발탁되어 출세할 목적으로 동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거지꼴이나 다름없이 돌아온 소진의 모습을 보고 형과 형수, 누이는 물론이고 아내와 첩까지도 거리낌 없이 희롱하고 비웃었다. 그러면서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에 힘써서 이익을 얻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인데 너는 본업을 돌보지 않은 채 입과 혀만 가지고 먹고 살려고 하니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모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라며 꾸짖었다.

소진은 부끄럽고 슬프고 분한 마음에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힌 지 1년 만에 상대방의 심리를 포착해 설득하는 유세의 비법을 터득하고 다시 자신을 중용할 제왕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당시 중국의 형세는 전국7웅이라고 해서 수많은 제후국 가운데에서 진(秦)나라,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 등 일곱 나라가 천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전국7웅 중 진나라가 변법개혁을 추진해 부국강병에 성공해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이후부터 나머지 여섯 나라는 진나라의 정치적·군사적·외교적 위협 앞에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소진은 진나라의 위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여섯 나라를 차례로 찾아가서 그곳의 제왕들에게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6국의 정치·군사동맹인 ‘합종책(合縱策)’을 맺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여섯 나라의 제왕이 모두 소진이 유세한 정치·군사 전략에 따라 합종책을 맺었고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이자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궁색한 유세객의 처지에서 한순간 전국시대 최고의 권력가로 변신한 소진은 어느 날 북쪽 조나라로 가는 길에 고향인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그의 행차는 제왕의 행차에 견줄 만큼 호화롭고 위엄이 넘쳤다. 더욱이 당시 동주의 천자(天子) 현왕(顯王)조차 소진을 두려워하여 그가 지나가는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 위로하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소진은 다시 지난날 자신을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꾸짖었던 형제와 형수, 누이, 아내와 첩을 만났는데 그들은 곁눈질만 할 뿐 고개를 들어 소진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함께 식사 하는 동안에도 죄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식사만 했다.

이에 소진이 웃으면서 형과 형수에게 “왜 예전에는 오만하게 저를 대하더니 이제는 공손하게 저를 대하십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형수는 나서서 “계자(季子: 막내아우 즉 소진)의 지위가 높고 귀하며 엄청난 재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아첨했다.

형수의 말을 듣고 난 소진은 길게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와 친척도 가난하면 업신여기고 부귀해지면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반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소진의 말은 “사람의 의리는 모두 가난한 곳에서 끊어지고, 세상의 인정은 곧 돈 있는 집으로 향한다”는 『명심보감』의 훈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궁색하면 세상 사람과 의리가 끊어지지만 부유하고 권세가 있으면 세상 사람의 인정이 모인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보면 참 슬프고 화나는 이야기지만 사람의 의리와 인정조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부유하면 할수록 의리와 인정이 넘쳐나는 반면 가난하면 할수록 의리와 인정도 궁색해지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