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土亭) 이지함① 물산(物産) 모여드는 마포나루에 ‘흙집’ 짓고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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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土亭) 이지함① 물산(物産) 모여드는 마포나루에 ‘흙집’ 짓고 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2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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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⑰

 

▲ 토정 이지함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화담(花潭) 가의 서재에서 서경덕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표적인 제자들을 꼽는다면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에 오른 사암(思庵) 박순, 사간원 대사간과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초당(草堂) 허엽, 우의정을 역임한 남봉(南峰) 정지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졸옹(拙翁) 홍성민 등이 있고 학문과 시문 그리고 행적으로 이름을 남긴 이로는 행촌(杏村) 민순, 고청(孤靑) 서기, 곤재(困齋) 정개청, 연방(蓮坊) 이구, 동강(東岡) 남언경 그리고 토정(土亭) 이지함 등을 꼽을 수 있다.

정계(政界)와 학계(學界)에 두루 포진한 서경덕의 제자들은 하나의 학풍(學風)을 형성하며 ‘목릉성세(穆陵盛世 : 학문과 문화가 융성했던 선조 시대를 일컫는 말. 목릉은 선조의 묘호(廟號))’를 주도했다.

이러한 까닭에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에서는 서경덕의 제자와 후학들이 조선 유학사에서 최초의 학파(學派)라고 할 수 있는 ‘화담학파(花潭學派)’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통 성리학을 세운 정자나 주자보다는 장횡거와 소강절의 학문과 사상에 가까웠던 서경덕처럼 특정 학문이나 학설에 구속당하지 않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물론이고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고 경제(經濟)에 밝아 수많은 기행(奇行)을 남겨 스승의 이름을 더욱 빛낸 제자로는 단연 토정(土亭) 이지함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이지함은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 금기시하다시피 한 ‘상업(商業)’과 ‘해상교역(海上交易)’을 국부(國富)와 안민(安民)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몸소 이를 실천에 옮긴 기이한(?) 인물이었다.

이지함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평생 충청도 보령의 해안지역과 한양의 마포나루를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마포나루는 서해 뱃길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전국 각지의 온갖 물산(物産)이 모여들던 상업과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상업을 가장 천시하던 유교 사회의 사대부가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곳이고 가까이 해서도 안 될 곳이었다.

▲ 1900년대 마포나루 모습

그런데 이지함은 이곳 마포나루에 거처할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다져 정자를 지어 토정(土亭)이라고 이름 짓고, 이로 말미암아 ‘토정(土亭)’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자신의 뜻과 삶의 지향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반촌(班村)에 있지 않고 천한 상인이나 온갖 장사꾼이 모여드는 나루터와 시장에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내력은 국가의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실록(實錄)』에서도 자세하게 밝혀 놓았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 항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그 아래에는 굴을 파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었다. 이로 인해 토정(土亭)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 후 비록 큰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가도 오히려 흙을 쌓은 언덕만은 그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11년(1578) 7월 1일, ‘아산현감 이지함의 졸기(卒記)’

어쨌든 이지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세간의 시선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남다른 기상과 높은 식견을 갖추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양반 사대부 출신의 사람이 사대부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장사치나 다름없는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인 매장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이지함을 ‘양반 상인의 모델’로 삼아 사회개혁론을 주창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사대부가 상업에 종사하거나 품팔이를 할 경우 당하게 되는 멸시와 수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사대부는 차라리 놀고먹을망정 들판에 나가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그러한 법도(法道)를 잘 알지 못하는 사대부가 있어서 짧은 저고리를 걸치고 대나무 삿갓을 쓴 채 물건을 팔려고 소리치며 시장을 지나가거나 먹줄을 지니고 칼과 끌을 품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집에 품을 팔아먹고 살 경우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비웃지 않고 또한 혼인을 단절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사대부라면 비록 집에 동전 한 푼 없는 자라도 모두 겉모양을 꾸미고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나라 안을 활보하고 고상한 말만 늘어놓는다.” 박제가,『북학의』, ‘장사(商賈)’

그래서 이지함과 동시대를 살았던 율곡은 그를 일컬어 사물에 비유하자면 “기이한 꽃(奇花), 이상한 풀(異草), 진기한 새(珍禽), 괴상한 돌(怪石)”이라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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