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의 역습…‘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이 부르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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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의 역습…‘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이 부르는 불행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10.02 0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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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쿠르니코바와 마리아 샤라포바가 테니스 스타로 성공하자 러시아 전역의 시골 마을에는 테니스 코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난한 부모들은 어린 딸이 스포츠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가지고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 부으며 자녀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과연 이들 자녀는 스포츠 스타로 성공했을까?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조차 아동 1만명 중 1명만이 대학에서 체육 특기자 장학금을 받고 1만명 중 6명만이 프로선수가 될 기회를 얻는다.

프로선수도 되지 못한 자녀를 보며 부모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죄책감과 불만을 떠안게 된다.

이후에도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에 초조해하고 현실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실패에 대해서도 자기 잘못이라 치부하게 된다.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이를 가리켜 ‘선택 이데올리기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선택 관념이 창조한 자수성가형 인간은 처음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력을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면 자연스럽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런 자수성가형 인간의 특징 가운데 도덕적 겸양이 강조될 때도 있고, 타인의 복리에 대한 책임성이 강조되기도 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적자생존의 전장과 같은 삶에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전리품을 차지한다는 관념이 용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삶 자체가 예술 작품 혹은 도전적인 기업 경영이라는 관념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런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선택을 부추기면서 각자의 선택과 그 결과에 엄청난 무게를 지운다.

스타벅스에 가면 카페모카 한 잔을 선택하기까지 컵 크기에서부터 커피의 종류와 카페인 여부 등 댓가지 조건을 선택해야 하나의 선택을 완성할 수 있다. 어떤 상품을 선택하든 마찬가지다.

소위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려면 이런 다양한 조건들을 잘 숙지하고 선별해야 한다. 그래야 만족할 만한 선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단 상품 선택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우리 삶은 결국 이런 수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상품을 선택하듯이 직업과 배우자에서부터 자기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데이트나 결혼, 출산이나 양육 등의 문제도 세심히 계획하고 합리적으로 계산해 본 뒤 결정하면 불확실성이나 리스크를 피해 기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사랑의 쾌락과 이별의 슬픔, 분노, 스트레스 같은 감정들도 관리와 선택의 대상이다.

최근 발간된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에서는 이 같은 이런 선택의 자유가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불안과 죄책감, 상대적 부족감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작동 방식과도 관련된다. 불안감이 커질 때 우리는 부인(denial)이라는 기제를 선택한다.

소비자와 관련해 첫 번째 단계의 부인은 소비에는 제한이 없고 누구나 소비를 추구할 수 있다는 관점과 연관돼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의 부인은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소비했는지를 부인할 필요, 소비를 하고도 실제로 소비하지 않았다고 인식할 필요와 관련돼 있다.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는 소비자는 소비를 하고도 곤란한 결과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즉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부채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는 지난 수십 년간 지속돼온 소비의 기초였다.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환영에 의지해 왔던 것이다.

살레츨은 이런 선택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노예조차도 주인처럼 생각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노예가 자기 인생을 바꿀 힘이 자기한테 있다고 믿도록 하는 자수성가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를 소비하게 만든다.

결과는 번아웃, 거식증과 폭식증, 기타 생활습관병들이다.

 

사회적으로는 인생의 진로를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워질수록 자기 운명을 지배하고 개척하라는 압박 역시 거세지는데,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미 극적으로 늘어났음에도 새로운 자기 계발(직업 훈련에서부터 외모와 건강관리)에 참여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나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하며 선택을 하거나 타인이 선택하는 걸 따라서 선택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선택지를 고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는 무의식이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영향을 받는다.

합리적 선택이론은 사람들이 편익의 극대화와 비용의 최소화를 추구한다고 전제하지만 인간이 반드시 자기 이익에만 입각해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증거 역시 꾸준히 제시되어 왔다.

1980~90년대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끌었던 살레츨은 자기계발에 대한 환상이 지배하는 친숙한 대중문화 사례들과 정신분석가를 찾은 환자들의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들을 특징짓는 정신적 징후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뿌리에 위치한 ‘선택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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