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蛟山) 허균① 이무기의 꿈…만민평등(萬民平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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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蛟山) 허균① 이무기의 꿈…만민평등(萬民平等)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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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⑱
▲ 교산 허균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허균을 대표하는 호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교산(蛟山)’이다. 교산이라는 호는 허균의 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태어난 강릉 외가의 뒷산 이름이 바로 교산이기 때문이다.

허균의 출생지는 강릉의 동해 바닷가 사천진(沙川津 : 현재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이다. 허균이 태어날 당시에는 사촌(沙村)이라고 불렀다.

오대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이무기처럼 기어가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교산 아래에 자리한 허균의 외가 터는 예부터 삼신산(三神山 : 금강산․지리산․한라산)과 더불어 조선 제일의 명산으로 손꼽힌 오대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허균이 태어날 당시 교산 아래 외가 인근 마을에는 실화인지 설화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신이(神異)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었다.

신유년(辛酉年)인 1561년(명종 16년)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교산 아래에 있던 큰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졌는데, 이때 두 동강 난 바위에 문처럼 구멍이 뚫려서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허균은 이무기가 바위를 두 동강 내고 사라진 지 8년 뒤인 1569년(선조 2년) 11월3일 세상에 나왔다. 어렸을 적 외가 집을 왕래할 때 허균은 분명 이 마을에 회자되는 ‘이무기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때 허균은 아마도 자신이 이야기 속 이무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생각했지 않나 싶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허균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교산이라는 그의 호가 단순히 지명(地名)을 취한 것이 아니라 ‘이무기의 정기’를 뜻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이무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허균의 생각은 먼저 그가 지은 ‘애일당기(愛日堂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 허균은 자신이 태어난 강릉 외가 집터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곳이 이무기의 정기와 전설이 서린 명당 중의 명당으로 특이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릉부(江陵府)에서 30리 정도 되는 곳에 사촌(沙村)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오대산·청학산·보현산 등 여러 산을 바라보고 있다. 큰 개울 한 줄기가 백병산에서 나와 촌락(村落) 가운데로 흘러든다. 이 개울을 빙 둘러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위아래 수 십 리에 걸쳐 거의 수 백 가호(家戶)나 된다. 모두 양쪽 언덕에 기대어 있고 개울을 바라보며 문을 내었다.

개울 동쪽의 산은 북쪽으로부터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려오는데 바닷가에 이르러 우뚝 솟아나와 사화산(沙火山)의 수(戍)자리가 되었다. 수자리 아래에는 예전에 큰 바위가 있었고 개울이 무너졌을 때 그 밑바닥에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 가정(嘉靖) 신유년 가을 늙은 이무기가 그 바위를 깨뜨리고 사라졌다. 두 동강이 난 바위에는 문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서 후세 사람들이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금 남쪽으로 언덕 하나가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데 쌍한정(雙閑亭)이라고 이름 한다. 고을 사람인 박공달(朴公達)과 박수량(朴遂良)이 한가롭게 노닐던 곳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산수의 형세가 매우 울창하며 깊고 그윽해 기운이 일어나 용솟음치는 까닭에 그 가운데에서 특이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마침내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애일당기(愛日堂記)’

허균의 나이 24세가 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허균은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함경도로 갔다가 다시 북쪽에서부터 배를 타고 교산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폐허나 다름없이 황량해진 외할아버지의 옛 집터인 애일당(愛日堂)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 후 거처로 삼았다. 마침내 오대산의 정기와 이무기의 정기가 합해 모인 바로 그 명당의 지맥(地脈)에 주인이 된 것이다.

아마도 교산을 뒷산 삼아 자리 잡은 애일당에서 허균은 장차 용이 되고자 한 ‘이무기의 꿈’을 꾸었으리라.

“나의 외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께서는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땅을 골라 그 위에 당(堂)을 지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창을 열어젖히면 일출(日出)을 볼 수 있었다. 참판공께서는 때마침 모친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당에 애일(愛日)이라고 편액(扁額)하였다. 황문(黃門) 오희맹(吳希孟)이 큰 액자를 써서 걸었고 태사(太史) 공용경(龔用卿)이 시를 지어 읊었다. 잇달아 일시에 여러 명인(名人)들이 화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애일당은 강릉에서 명성을 떨쳤다.

임진년(壬辰年) 가을에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북쪽으로부터 배를 타고 교산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당(堂)을 청소하고 그곳에 거처하였다. 대개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33년이 흘렀다. 뜰에는 풀을 제거하지 않아 버려진 들판처럼 덩굴이 엉키고 잡목들이 무성했고, 그물처럼 노송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담은 허물어지거나 기울었고 집은 장차 내려앉을 듯 보였고, 지붕은 벗겨져 있고 벽은 갈라져 있었다. 시가 적혀 있는 현판은 절반도 남아있지 않고, 비가 새어 더럽혀진 들보와 서까래는 더러 썩은 것도 있었고, 창호와 지게문 역시 썩어서 허물어진 것이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어머니는 통곡하며 울었다. 나는 하인들을 급하게 재촉하여 더러워진 곳은 쓸어내고 덩굴과 잡목들을 걷어내 말끔하게 청소한 다음 이곳에 거처하였다. 『성소부부고』, ‘애일당기’

허균이 ‘교산’이라는 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도 이 무렵부터였다. 허균이 호로 삼은 교산은 글자 뜻 그대로 ‘이무기 산’이다. 그렇다면 이무기를 자신의 호로 취한 허균의 뜻과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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