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울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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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울의 흔적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4.10.09 12: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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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생활은 1980년대 중반 청계천 7가에서 시작됐다. 서울 물정 전혀 모른 시골 촌놈은 TV에서나 보았던 아파트 생활에 매료돼 지금은 철거된 삼일고가도로 북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삼일아파트에 덜커덩 전세방을 얻었다.

말이 아파트였지 살림집은 없고, 집집마다 가내수공업 수준의 봉제공장들이 빼곡히 들어 앉아있었다. 밤낮으로 돌아가는 미싱과 삼일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품어내는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에 의한 입체 소음은 결코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꼭 1년을 견디며 살았다.

그렇다고 그곳에서의 1년이 나쁜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는 않다. 심심찮게 둘러보는 재미와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었던 건너편의 황학시장 때문이었다.

도깨비시장 혹은 벼룩시장으로 불렸던 황학시장은 별칭 그대로 중고품 천지였다. 이런 것도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나 싶을 만큼 어린 시절 흔했던 폐가의 케케묵은 문짝을 비롯해 최신 전자제품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물론 나의 단칸 전세방에도 황학시장을 둘러본 전리품들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했다.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구입했던 수많은 LP 음반들은 지금도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청동으로 빚어낸 중세 기사상은 오디오 위에서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낸다.

간혹 청계천 7가를 지나칠 때는 잠깐씩 황학시장 안을 기웃거려본다. 그러나 번잡하고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의 정취는 사라지고 없다. 청계천 정비사업으로 길거리 상인들은 신설동에 마련된 풍물시장과 길 건너편 동묘 골목으로 쫓겨났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장은 모든 게 부실하다. 규격화된 가게와 상품에는 감동이 없다. 동묘 골목의 벼룩시장이 그나마 비슷한 흉내를 내고 있지만 역시 흉내뿐이다.

첨단 기술을 쫓으며 빼앗긴 삶의 풍요로움은 비단 황학동 벼룩시장만이 아니다. 서울 도심의 화려한 외관의 빌딩들은 죄다 추억과 낭만을 잡아먹고 들어섰다.

비릿한 생선내음을 쏟아내며 피맛골 골목을 뿌옇게 오염(?)시켰던, 연탄석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던 고등어와 삼치의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드럼통 위에 걸쳐놓은 원형 양은탁자에 둘러앉아 삼삼오오 막걸리를 마셨던 대폿집은 인사동 골목에서조차 찾기 힘들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름도 낯선 빌딩이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키재기를 하고 있다. 예전의 식당들은 모두 빌딩 속으로 숨어들어 음식의 맛보다는 가격만 올렸다. 하기야 돈이 조금 된다 싶으니 한류를 앞세워 고궁까지 상품화시키고 있는 문화정책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넋두리가 무슨 소용이랴.

과거를 지우고 들어선 문화에는 감동이 없다. 잠깐 겉모습에 환호는 할지언정 가슴으로 파고드는 기억의 울림까지는 담아낼 수 없다. 500년 도시 서울에서 500년의 흔적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30대까지는 미래를 먹고 살지만 40대부터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일상의 흔적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불현듯 그것의 소중함을 느꼈을 때 기억할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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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友 2014-12-08 12:09:37
아~
옛날이어...
전적 동감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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