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蛟山) 허균③ “세상 사람이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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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蛟山) 허균③ “세상 사람이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있겠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1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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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⑱
▲ 강릉 초당의 허균 생가.

[한정주=역사평론가] 대개 사람들은 허균의 비극적인 죽음에 빗대어 그를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용을 꿈꾼 이무기’라고 부르고 싶다. 전자가 실패한 인간으로 허균을 바라본다면, 후자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꾼 사람으로 허균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이러한 생각은 허균의 시대뿐만 아니라 신분 질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가치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우리 삶의 현실과 미래 모두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용을 꿈꾸는 이무기, 곧 더 평등한 사회와 삶을 꿈꾸는 수많은 허균들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허균은 스스로의 힘으로 용이 되려고 하는 모든 피억압․피지배 계층의 영원한 아이콘일 수밖에 없다.

허균은 교산이라는 호 이외에도 학산(鶴山), 백월거사(白月居士), 성소(惺所), 성옹(惺翁), 성성옹(惺惺翁)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들 호를 살펴보면 허균이 유독 ‘성(惺)’이라는 한 글자를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 허균은 1611년(광해군 3년) 나이 43세 때 전라도 함열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시문(詩文)이나 각종 논설(論說)과 비평(批評) 및 기록 등을 모아 엮은 문집(文集)의 이름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고 붙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7년 후(1618년) 그가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기 직전 이미 죽음을 예감한 바로 그 순간에도 혹시 의금부에 압수당해 유실될 것을 두려워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은밀하게 출가한 딸의 집으로 보낼 만큼 아꼈던 문집이었다.

자신의 삶의 흔적과 사상 편린이 모두 담긴 문집의 제목으로 삼았을 정도로 허균에게 ‘성(惺)’이라는 한 글자는 각별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 나이 43세 때 전라도 함열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시문(詩文)과 논설(論說), 비평(批評) 및 기록 등을 모아 엮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이 중년 무렵 스스로를 관찰하고 성찰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의 제목 역시 ‘교산송(蛟山頌)이 아닌 ‘성옹송(惺翁頌)’이었다.

“성옹(惺翁)은 어떤 사람인가 / 감히 그 덕(德)을 기리네 / 그의 덕(德)이 어떠한가 하면 / 어리석고 무식하기 그지없네 / 무식하다 못해 못나기까지 하네 / 어리석다 못해 미련하기까지 하네 / 미련하고 또한 볼품없으니 / 무엇을 내세워 공(功)으로 삼을까 / 어리석은 즉 조급하지 않고 / 미련한 즉 화를 내지 않네 / 화를 내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니 / 겉모양은 꾸물꾸물하네 / 온 세상 사람이 일어나 분주하게 쫓아다니지만 / 성옹(惺翁)은 따르지 않네 / 다른 사람은 고통으로 여기는 것을 / 성옹(惺翁)은 홀로 즐거워하네 /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맑아서 / 미련하고 볼품없지만 / 정신은 모여 기운이 넘치네 / 어리석고 무식한 까닭에 / 형벌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고 / 좌천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네 / 비방하든 매도하든 내버려두고 / 기뻐하고 즐거워하네 / 스스로 송(頌)을 짓지 않으면 / 누가 있어 너를 기릴 것인가 / 성옹(惺翁)이 누구인가 / 바로 허균(許筠) 단보(端甫) 이네.” 『성소부부고』, ‘성옹송’

허균은 화담(花潭) 서경덕의 수제자나 다름없었던 초당(草堂)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경덕의 학풍 탓인지는 몰라도 허엽의 집안은 당시 양반 사대부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풍(家風)을 띠고 있었다.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은 서얼 출신인 손곡(蓀谷) 이달과 절친한 사이였을 뿐더러 아우인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삼았을 만큼 가문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또한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사대부가의 관례를 깨고 딸인 허난설헌이 자유롭게 시문을 짓고 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허균의 집안이 얼마나 신분이나 성별에 따른 사회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독특하고도 남다른 가풍 속에서 성장한 탓에 허균은 장성하면서 유학이나 성리학 이외에도 불교, 도교, 노장(老莊)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더욱이 그것으로도 못자라 마치 유가의 예법과 질서에 도전이라도 하는 듯 공공연하게 불가나 도가의 학설을 설파하고 그곳의 논리에 따라 파격적이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사대부가의 예법을 깨고 ‘참선하고 부처에게 절을 하는 일’을 예사로 여겼고 승려들과 교류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명나라에 갔을 때 접한 서학(西學)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사상 최대의 이단자로 지목당한 이탁오의 사상에도 심취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허균이 최초로 “명나라에 갔다가 천주교 선교사들의 지도와 게(偈) 12장을 가지고 왔다”고 했고, 허균이 직접 엮은 『한정록(閑情錄)』에는 이단 서적이라고 하여 금서(禁書)로 엄격하게 다루어진 이탁오의 『분서(焚書)』가 등장한다.

허균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삶과 기이하고 파격적인 행동은 당연히 오직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라는 미혹에 빠져 있던 당시 식자(識者)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비방을 샀다.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천생일괴물허균(天生一怪物許筠)”, 즉 ‘하늘이 보낸 하나의 괴물이 허균’이라거나 “균일생소위 만악구비(筠一生所爲 萬惡俱備)”, 곧 ‘허균이 일생 동안 한 일이란 만 가지 악(惡)을 모두 갖춘 것’일 따름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적었다.

또한 허균이 죽고 난 후 간행된 실록인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편찬자나 사관들은 허균을 가리켜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붓을 들면 수 천 마디의 말을 써 내렸다. 그러나 허위로 꾸민 책을 짓는 것을 좋아하여 산수(山水)나 도참설(圖讖說)과 선가(仙家)나 불가(佛家)의 기이한 행적에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그 글이 평소 때 지은 것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광해군 6년(1614년) 10월10일)”라는 혹평을 남기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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